’5주간의 영어정복’ 가족도 친구도 술도 끊었다
[직접 가봤더니…] 중년 회사원 합숙 영어전쟁
영어 못하면 승진도 못해… 새벽까지 숙제·복습
오늘도 테이프가 늘어져라 돌리고 돌리며 듣는다
지난달 27일 밤 경기 이천시의 한 대기업 교육연수원. 책에 머리를 묻고 있는 이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새벽이 다 돼 가는데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40대 중ㆍ후반의 차장, 부장 등 간부들. 이 곳에 들어온 지 벌써 3주째. 중년의 아버지들이 그토록 매달리고 있는 것은 영어요, 토익(TOEIC)이다.
김현(45ㆍ가명) 차장은 새벽 4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듣기 숙제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곧 있을 2차 모의 토익시험도 걱정이다. 연신 받아쓰기를 해보지만 단어 몇 개 이외에는 도무지 들리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17년 만에 처음 펴 본 영어책입니다. 그야말로 까만 것은 글자요, 하얀 것은 종이일 뿐입니다.” 주격과 소유격이 무엇인지 4ㆍ5형식 문장은 어떤 구조였는지, 자동사의 반대는 수동사인지도 가물가물하다. 평균 수면 4시간, 하루 평균 16시간 공부의 강행군을 소화하고 있다. 10여명의 같은 반 동료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다.
이게 무슨 고생일까. 밑에서는 새파란 후배들이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위협하고, 위에서는 세계화를 외치며 공부하라고 난리다. 진퇴양난이다. 승진하려면 토익 점수가 600점은 넘어야 한다.
요즘 신입사원들이 들으면 웃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평균 점수는 300점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1차 모의시험에서 200점대 점수를 받은 한 참가자는 “토익의 ‘토’자도 몰랐다. 첫 시험에는 200문제를 푸는데 10분이 지나니 할 일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오기와 자존심도 발동한다. 부하 직원들에게 좀 더 자신만만하게 지시를 내리고 싶고, 가족 앞에서도 어깨 좀 펴고 싶다. “중학교 1학년 아들 영어숙제를 도와주려다 망신만 당했습니다. 아들 앞에서 당당한 아버지가 되고 싶지요.”(46ㆍ부장)
그래서 독하게 마음먹었다. 아내, 아들의 생일도 잊었다. 친구들과의 연락도 끊고 경조사에도 가지 않는다. 그 좋아하던 술도 합숙 동안에는 끊었다.
28일 오전 7시40분에 시작한 수업은 오후 6시에야 끝났다. 수업 중에는 둥그렇게 둘러 앉아 책을 옆에 쌓아놓고 강의를 듣는다. 잡담이 있을 리 없다. 엄숙함을 넘어 언뜻 비장함까지 보인다.
수업이 끝나고 식사와 휴식에 할애된 시간은 1시간. 다시 빈 강의실과 숙소에서 새벽 2~3시까지 숙제와 복습이 이어졌다. 잠자리에 든다고 휴식은 아니다. 영어 듣기 테이프를 틀어놓고 이어폰을 낀 채 잠을 청하는 이도 있다.
강사 박은하(33ㆍ여)씨는 “일찍 자야 다음 날 수업에 지장이 없다고 말하지만 잘 지켜지질 않는다”고 했다. 주말엔 외출이 허락되지만 대부분 그냥 있는다. 주말을 쉬고 나면 그간 공부해 온 리듬이 깨진다고 한다. 영락 없는 고3이다.
마음은 잡았지만 몸은 쉽게 따라와 주지 않는다. 5주 과정에 이제 6부 능선을 넘어선 지금, 무리한 영어단어 외우기는 두통과 근육통을 안겼다. 공부 스트레스에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는가 하면, 평생에 없던 변비로 고생하는 이도 있다. 체력 소진에 수면 부족이 겹쳐 쉬는 시간마다 책상에 엎드리는 이들도 점점 눈에 띈다.
힘들면 서러운 법이다. 어학 능력이 업무 능력의 중요한 기준으로 인식되는 현실에 대한 서운함을 숨길 수는 없다. “우리들이 입사할 때는 일만 열심히 하라고 해서 다른 건 다 잊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이곳 저곳에서 ‘영어, 영어’하고 외쳐대니 솔직히 본전 생각도 납니다.”(44ㆍ차장) “합숙 중 딸의 영어 편지를 읽고 화장실에 앉아 눈물도 흘려봤습니다.”(43ㆍ차장)
그래도 점차 말문이 트이고 성적도 조금씩 오르는 게 신기하다. 재미도 붙어간다. 한 참가자는 “합숙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공부해 영어강사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며 농담을 건넸다.
원하는 성적에 이르기까지 갈 길이 멀고, 집중력도 날이 갈수록 떨어지는 중년의 아버지들.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신념을 되뇌이면서, 영어에 맺힌 한풀이를 하듯, 테이프가 늘어져라고 돌리고 또 돌려 듣는다.
28일 밤 1박 2일 간의 동행 취재를 마치고 나설 즈음 누군가 그랬다. “박 기자, 다 끝나면 언제 소주 한잔 해야지.” 그 때가 되면 ‘Cheers!’(건배) ‘Bottom’s up!’(원샷) 하는 소리를 정통 미국식 발음으로 듣게 될 것 같다.
이천=박상진기자 oko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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