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수호해야할 법의 이름으로 얼마 전 만인의 주시리에 자행된 이 살인사건은 문명의 첨단을 걷고 있는 현대인의 양심에 비수를 꽂는, 반문명적 야만을 극적으로 보여준 가장 비열한 희대의 엽기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 오후 6시 텍사스 주 헌츠빌의 한적한 변방에 위치한 고딕형 건물의 음산하기 짝이 없는 사형실 중앙에 마련된 사형용 침대에는 얼굴이 백짓장 같이 창백한 한 여인이 손발과 온 몸이 캔버스 쪽의 굵은 오랏줄로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촉촉이 젖은 그녀의 눈언저리는 간혹 파르르 경련이 스치고 지나갔다. 가냘프게만 보이는 이 여인은 오랜 세월 그녀를 괴롭혀 온 악몽의 끝자락이라고나 할까, 그 끔찍한 최후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이내 모든 것을 체념을 한 듯, 아니 어쩌면 스스로 크리스찬으로 거듭났다고 고백한 그녀가 신의 가호에 안기듯 지긋이 눈을 감은 그녀의 표정에 평온이 감돌았다. 이윽고 간수장이 안경을 벗는 것을 신호로 그녀의 여윈 몸에 강한 독극물 칵테일이 주입되었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창녀생활을 했어야 할 만큰 불운했던 카알라 훼이 터커에겐 그녀의 저승길 또한 이처럼 애처로웠다.
이 형무소 밖에서는 1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일부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등의 찬송가를 부르는가 하면, 일부는 마치 축구경기 응원단처럼 떠들썩하게 이 날의 살인을 자축하고 있었다. 생사의 갈림길 요단강 양안만큼이나 이념이 다른 이들이 손에 치켜든 플래카드의 내용 역시 대조적이었다.
“남자처럼 대범하게 가라!”
“예수님도 사형의 희생자였다.”
1983년 6월 13일 새벽, 23세의 가녀린 터커가 그녀의 남자친구와 함께 코카인에 취해 2피트 크기의 곡괭이을 데보라 손턴의 가슴에 네 번이나 내리찍던 그 살벌한 순간과, 38세의 성숙한 중년이 된 그녀가 때마침 보슬비가 음산하게 뿌리는 헌츠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순간 사이에, 이 끔찍한 두 사건의 시차 만큼이나 상상을 초월한 극적인 기적이 일어났었다.
한 때 급물살을 탔던 그녀의 사면운동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록 뮤직 황제 비앙카 재거, 미국의 대표적 보수주의 목사 팻 로벗슨, 그리고 ACLU (미국시민자유연맹)와 같은 쟁쟁한 후원자들을 얻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과 시민 자유주의자들이 한 편이 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터커는 사형문제에 대해 찬반 양 세력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비록 조금씩이나마 여는 계기를 제공했다. 기독교방송 네트워크의 한 여기자는 사형제도를 찬성하던 자신의 생각이 터커의 사면 지지로 선회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터커는 우리가 사형수들에 대해 갖고 있던 종래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었어요.”
터커가 팻 로벗슨 목사의 ‘700 클럽’ TV 프로에 나와 크리스찬으로 거듭났음을 고백을 할 때 그녀의 얼굴에 흘러내린 두 줄기의 눈물이 사형의 비인륜성을 외면해 온 미국의 양심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 때 터커의 흰 피부색, 여성이라는 성, 미모, 그리고 그녀의 기독교에의 귀의가 일급 살인자는 그 범행에 상응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혼선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살인은 대부분 우발적인 데 반해, 사형은 집행 그 자체의 비인도성을 말할 것도 없고, 언도에서부터 집행의 순간까지 사형수의 자의식에 가한 연속적 가학성의 고문에 다름 아니다. 살인범죄의 대부분이 불의와 부당한 사회적 제약에 대한 항의 혹은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저지른 우발적 감정폭발에 기인하거나 혹은 정신질환의 발작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범죄와 형벌의 현대적 의미와 특히 이에 따른 형벌의 유효 적정수준 등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고 형벌은 범법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정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에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특히 형벌이 법범자의 사회복귀 희망을 차단할 정도로 장기적 인신구속을 요구할 경우, 형벌의 목적이 상실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즉, 형벌은 첫째 범죄예방의 경고기능, 둘째 범법자의 사회복귀가 그 목적이며, 형벌의 효력은 범법자가 사회복귀 의지를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다.
요즘 버지니아 주의 주지사 선거전에서 어느 정당 후보는 사형제도의 적극적 지지를 내세우면서 이를 반대하는 상대방 후보를 “살인자들의 편”이라고 공격하고 있다. 그가 검찰총장 출신이라고 하는데 그는 법이 인간을 동물적 야만에서 구제하는 사회적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것 같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다. 살인은 범죄에 의한 것이거나, 형벌에 의한 것이거나 모두 신의 섭리를 거역하는 반문명적 잔혹행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버지니아 선거에서 사형지지자들에 대한 단호한 단죄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sLee-kpi@msn.com
이선명/KPI통신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