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태양의 열기가 아스팔트 위를 뜨겁게 달구던 햇살도 그 열이 엷어지고, 소슬바람이 산을 넘어 쓸쓸함이 끌려오면서 사방천지는 추색을 살며시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계절의 빛깔 중 가을의 빛깔만큼이나 화려한 것이 있을까.
오색 숲 속을 거닐며 황홀한 풍치를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시간. 그런데 이 지역은 겨울과 여름은 있지만 봄과 가을이 찾아오는 것 같으면서 어느 날 다른 계절인 더위와 장마 전선으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니 붉고 노란 색으로 변화되어 가는 숲 속을 거닐어볼 산색이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까지 갈 시간의 여유도 잘 내지 못하고 있었다. 황무지 같은 대륙에서 나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언제나 시계바늘처럼 돌아가는 이 곳 일상에서 하루쯤 시간을 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의 계절은 뚜렷해 자연을 즐기기는 좋았다. 그런데 이곳 생활에서는 시간과 계절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고 이때쯤이면 가까운 지인 몇 명이 우리 집 뒤뜰에서 나의 생일파티가 열린다. 토종 한식으로 이민자의 기쁨과 슬픔을 엮어 가는 둥우리 속에서 축배를 들면서 변화되어 가는 잎새들을 이야기하면서 깊어 가는 가을밤을 만끽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금년엔 내가 주인이 아닌 초대자로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얼마 전부터 신문에 발표되고 있는 나의 글을 읽고 알게 된 화가의 집으로 나는 초대를 받았다. 그는 가끔 나의 글 속에 나오는 자연의 묘사를 할 때는 화가 존 마틴(John Martin)의 작품을 보여주면서 산이나 계곡으로 흐르는 물을 그림 속에 나타난 것과 글 속에서 표현된 것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림에 대해선 무지한 나는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화가의 집을 찾았다. 멀리 베이가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집안은 아늑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고, 벽엔 그녀를 대신하듯 자연의 오묘함이 흐르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어깨선이 곱게 파인 검은 롱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그녀가 들고 온 와인 잔을 내 앞으로 내어 밀었다. 생일을 축하한다면서 우리는 건배를 했다. 그러면서 오늘 생일은 특별히 나에게 들려줄 것이 있어 아무도 초대를 안 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나는 무슨 특별한 그림이라도 선물할까 생각했는데 그는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놓고 있었다. 딸이 치는 피아노를 자랑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자에 않아 두 손을 건반 위에 올려놓고 호흡을 조절하고 있었다. 화가와 피아노. 나는 쉽게 그림이 되지 않았다.
열 손가락을 건반 위로 내려치면서 단번에 ‘기뻐하라 신의 불꽃’의 멜로디가 리빙룸 안으로 쫙 퍼졌다. 그녀의 부드럽고 고운 손가락은 검은건반과 흰건반 위를 사푼사푼 옮겨 놓으면서 강렬하고 부드러운 선율을 흘리고 있었다.
프리드리히 쉴러(Schillers Friedrich)의 ‘환희에 부침’이란 시에 베토벤이 30여년이란 긴 세월동안 인간을 초월한 인류 최고의 예술작품을 완성시켰다. 1924년 5월7일 빈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던 곡. ‘참된 친구들과 어울려,’ 이 음악 속에는 인간이 가진 모든 희로애락에 대한 깊은 공감과 그의 해석, 다시 말해서 철학인 동시에 인생관을 피력한 것이었다. 육체와 정신이 맞붙어 씨름한 그의 운명을 생각해 본다. 이 곡은 작곡할 때 그는 자기의 어금니와 피아노 건반에 줄을 매어서 소리의 파동을 느꼈다고 했던 베토벤. 그의 의지는 그의 운명을 극복했던 것이다.
베토벤의 정열적이고 예지에 찬 감동적인 장엄하고 강력함을 주는 음악 속을 산책하면서 그녀는 캔버스 위에 자신의 영혼을 불사르며, 자신의 분신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표현한 것 같았다. 그녀의 그림은 색조와 선이 살아 움직여 보는 이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다. 예술은 자신의 존재를 용광로 속에 던져 녹아 흐르게 하여 그 고뇌의 모습을 표현하고, 글 속에 스며들게 할 수 있는 예지에 찬 빛을 나타낼 수 있을 때 예술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녀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을 불사르지 않고 화려한 불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보고 있었던 나의 아둔함을 탓하였다. 오늘 그동안 잠자고 있던 나의 영혼을 깨워준 생일축하에 감사함을 표하고 집을 나왔다. 낙엽들이 뒹굴고 있는 포도 위를 천천히 굴러가면서 화가의 힘차고 정력적인 환희의 선율 소리가 귓전에서 쉽게 떠나가지 않고 있었다.
이동휘
약력
<조선문학>등단. <무주 문학> 수필 신인상
한국소설가협 회원. 미주 문협 및 재미수필문학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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