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상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왕이 남게 될까. 다섯이다. 트럼프 카드의 네 왕과 영국의 왕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이집트의 사실상의 마지막 왕 파루크 1세가 즐기던 재치문답이었다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것이었을까. 그는 1952년 나세르가 이끄는 청년장교단의 쿠데타에 의해 권좌에서 내쫓긴다.
그 영국 왕실도 사라질 것이다.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각계 전문가들을 동원해 앞으로 35년 내에 사라질 것으로 보이는 것들을 열거했다. 그 중 하나가 영국 왕실이다.
품격과 위엄보다는 부정과 배신 등으로 얼룩졌다. 이런 왕실은 더 이상 모범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머지않아 과거의 유물이 된다는 전망이다.
중국 공산당도 멸종 후보에 포함됐다. 공산당 최우선 일당독재 이데올로기는 결국 경제성장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이다. 중국사회 전체에 암처럼 번진 부정부패를 바로 중국 공산당이란 공룡이 붕괴될 전조로 파악한 것이다.
국가주권(主權·Sovereignty)도 그 리스트에 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들이 소멸된다고 본 건 아니다. 지난 350여년 동안 국제사회에서 절대시되어 왔던 국가주권이란 개념에 상당한 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가장 결정적 요소는 인권(人權)이다. ‘개인주권’으로까지 불리는 인권은 국가주권에 우선한다. 이 개념이 우세해지면서 종래의 국가관에 엄청난 변화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변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1975년 8월1일. 북미와 유럽의 35개국 대표들이 헬싱키 핀란디아 홀에 모였다. 나중에 헬싱키 선언으로 알려진 동서협정에 서명하기 위해서다. 이 날은 20세기의 한 전환점을 이루는 날이었다. 그 날 모인 사람들은 정작 그 역사적 중요성을 깨닫지는 못했지만.
말(words)이 체제 붕괴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한 계기가 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제의로 시작된 협상이었다. 소련제국의 영역을 서방이 인정해 달라는 크렘린의 요청에 지루한 협상이 시작됐다. 워싱턴은 마침내 소련측의 요구를 거의 다 수용키로 했다. 대신 한 가지 안을 제시했다. 인권조항을 첨가한다는 것이다.
동구권 국가에서 인권이 제대로 지켜진다면 소련측 요구를 다 들어준다는 것. 단지 선언적 의미밖에 없어 보였다. 브레즈네프는 응했다. 헬싱키 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그 인권이란 말이 그런데 강력한 무기가 됐다. 소련은 물론이고 체코, 폴란드 등지에서 반체제 인사들이 그 말에 힘을 얻어 인권운동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선언이 채택된 지 16년만에 소련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말이, 아이디어를 표현한 말이 강력한 무기가 돼 공산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사실 모호한 개념이었다. 아이디어의 표현일 뿐 아무 구속력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인권은 주권과 긴장관계를 갖는다. 이때부터 나온 말이다. 자국민을 압제하는 체제는 문제가 된다. 이런 체제에게 국가주권의 절대권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인권을 말살하는 폭정체제는 ‘레짐 체인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념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왜 인권은 국가주권에 우선하나. 그 개념을 C. S. 루이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불멸한다는 믿음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간의 차이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70년 정도만 살다가 죽는다면 천년 동안 계속될 국가나 문명이 개인보다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 불멸의 믿음이 참이라면 영원히 살 인간에 비해 국가나 문명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개인은 국가보다 단순히 더 중요한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아예 비교가 불가능한 정도로 중요한 존재로 격상된다는 것이다. 개인주권이 국가주권에 우선한다는 사상의 배경이다.
유럽연합(EU) 25개국이 유엔 총회에서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을 추진할 예정이다.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인권말살의 참상이 그 땅에서 계속되고 있어서다. 3년 연속 유엔 인권위가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래도 전혀 반응이 없다. 그래서 총회에 회부키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 나오는 반응이 그런데 가관이다. 노무현 정부는 또 기권할 방침을 내비친다. 이유가 뭐라더라. 남북관계의 특수성이 어쩌고저쩌고…. 북한 인권문제 제기는 주권침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일부 젊은 대학생들의 시각이고, 일부 386의원들의 소신인 모양이다.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다. 세계 공동의 이데올로기다. 인권을 압살하는 체제는, 때문에 인류의 공동의 적이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이다. 이런 체제의 인권상황을 토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그러므로 내정간섭이 아니다. 이는 국제사회의 하나의 상식이다.
한국의 시계는 도대체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옥 세 철
<논설위원>
secho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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