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분단의 아픔 속에서 한민족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꼭 가보고 싶었던 명산-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금강산’은 가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땅이었다.
더욱 북녘에 두고 온 가족과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수많은 실향민과 이산가족들에겐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어 그리움으로 멍이든, 가슴속에 살아있는 그런 ‘산’이다.
이런 금강산이기에 꿈에라도 가보고 싶었는데 행운으로 지난 추석 전후해서 금강산과 설악산을 다녀왔다. 살아 생전에 아름다운 금강산을 눈으로 보고 싶었던 염원이 우연한 기회로 이루어 진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8시간만에 강원도 숙소를 걸쳐 38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땅에 들어섰다.
예로부터 금강산은 철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 그 절경의 아름다운 변화무쌍하기에 이름마저 달리 불려졌다고 한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절경이었기에 옛날부터 수많은 시인 문객과 화가가 금강산 구경을 얼마나 갈망했는가는 그 뜻을 이룬 이들의 감동적인 시와 글, 그리고 수많은 금강산 화폭을 통해서 드러나 있다.
그림에서만도 조선시대 최고의 진경화가 정선이 금강산 곳곳을 답사하고 난 뒤 1734년에 그린 유명한 ‘금강전도’(국보 제217호)와 단원 김홍도가 1788년 정조대왕의 명을 받고 금강산 곳곳의 현장을 스케치하여 그린 연작 ‘실경화첩’들이 남아 있다.
그런 금강산이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부자가 소 떼를 몰고 반세기 동안 녹이 슨 판문점의 철책을 열고 북한 땅에 발을 디딘 결과 분단 반세기만에 1,000여명의 남쪽 관광객을 실은 현대 ‘금강호’가 역사의 장을 열게 된 것 이다.
그 이후 금강산은 이제 맘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살아있는 민족의 화해의 만남의 장이자 국내외 관광객을 환호케 하는 세계적인 명산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금강산이 남한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이제는 버스를 타고 육로로 매일 600여명에서 1,000명씩 금강산을 찾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이곳 저곳 발로 답사한다.
그리고 정밀한 사진기술로 숨겨진 비경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번 금강산을 다녀오면서 사온 이정수 사진작가의 ‘아! 금강산’이라는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러나 한가지 아름다운 자연과는 달리 철책 주변의 열악한 주택과 깡마른 북한 주민들과 어린아이들은 10여대의 관광버스가 들락거려도 고개를 들고 바라다보는 호기심마저 잃어버린 채 들녘에서 무표정하게 일만하고 있었다.
정말 그 곳에 자유가 강물처럼 흘러 인권이 존중된 사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갖게 된다. 그런 가운데서도 관광 길 이곳 저곳에서 잠깐씩 마주치는 북한 안내원이나 상점 점원들과 짧은 이야기나마 나눌 수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제는 남과 북이 하나가 되어갈 수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금강산에서는 민족의 염원인 통일의 꽃망울이 맺혀가고 있었다. 마치 이른봄 눈 덮인 바위틈에서 피어난 한 송이 진달래가 머지않아 온 산천에 진달래꽃이 만발한 봄이 옴을 알리듯 이 같은 남북간의 작은 만남은 언젠가 이루어질 ‘한반도 통일’의 전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김재동 LA 한미인권연구소 회장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