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뇨병 치료 세계적 권위자
▶ 그의 학문, 신앙, 인생 세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꿈이었어요. 자꾸만 죽어버리는 베타세포를 대량 생산하는 연구. 그것만 성공하면 전세계 수백만의 당뇨병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었죠.”
지난 9월 25일 전세계 수백만명의 당뇨병 환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 한인 과학자인 로잘린 프랭클린 시카고 의대 당뇨병연구소장이 주도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당뇨병 치료를 위한 베타세포를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기술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을 타고 전세계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바로 한인 과학자 윤지원 교수(70). 30년간 당뇨병을 연구한 세계적 권위자인 윤 교수는 2년전 시카고로 이주해 왔다. 미 국립보건원(NIH) 수석연구관, 캐나다 정부 석좌교수를 거친 그는 놀랍게도 한국과 미국, 캐나다에서는 목사님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인생에 있어 첫째는 신앙, 둘째는 건강, 셋째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그를 지난 10월초 의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기자는 윤 교수에 대한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한국 언론이 그가 재직 중인 학교를 시카고 의대로 기재하는 바람에 시카고 의대에서 그를 찾았다. 정확히 그가 있는 학교의 이름은 로잘린 프랭클린 시카고 메티컬 센터(3333 Green Bay Rd., North Chicago)로 유태인들이 100년 전에 세운 유서깊은 학교다. 그의 이력서는 무려 5장에 달한다. 이력서 맨 앞장에는 Ji-Won Yoon이라는 그의 영문 이름 석자 위로 ‘브리프(Brief)’라는 단서가 붙어 있지만, 간단히 소개하는 그의 이력은 5장에 걸쳐서야 설명이 가능하다. 수상 경력만 20차례, 생명공학 최고 귄위지인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러지’를 포함해 게재 논문만 66건, 출간만 11건에 달한다. 이 학교의 주요 프로젝트 중 하나인 당뇨병 연구소는 그가 시카고행을 결심하면서 생겼다. 2004년 8월 설립된지 1년만에 이같은 쾌거를 이룩한 그를 두고 학교측은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전효숙 교수를 비롯해 약 10여명의 한인 연구원이 그와 함께 한다. 73년 네이처지에 한인으론 유일하게 논문을 게재한 그는 79년 바이러스가 당뇨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타임즈가 정치 기사를 제치고 그의 연구를 1면에 실었다. BBC에서는 그를 1주일간 따라다니며 집중 취재해 갔다.
그가 최근 발표한 쾌거는 당뇨병 환자가 지긋지긋한 인슐린 주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실질적으로 20년 전부터 계획해온 연구였고, 지난 3년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윤 교수 외에도 미국, 캐나다, 일본, 유럽 여러 나라 등에서 베타세포를 제한 없이 길러내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왔다. 초를 다투는 연구였다. 미국에서는 하버드대, 미네소타대, 마이애미 의대 등에서 같은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베타세포는 잘 증식하지 않아 20일만에 죽어버리곤 해이를 성공적으로 길러내는 방법을 개발해 낸 연구팀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일본의 오카야마대 코바야시 박사 그룹과 공동 연구를 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췌장의 베타세포와 기능이 매우 유사한 베타세포를 시험관에서 대량 증식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고 지난 9월 윤교수와 연구팀은 이에 성공했다. (지난 3년간 윤교수가 1분의 시간을 아껴가며 완성한 이 연구의 대략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형질이 전환된 세포 중 인슐린을 생산하는 베타세포를 분리해 이 중 이의 특이한 형질을 모두 갖춘 단일 세포를 클로닝한다. 이는 시험관 내에게 필요한 양만큼 증식시킬 수 있는 세포들이다. 증식된 세포에서 유전자 조작에 사용한 유전인자를 제거해 췌장에 있는 정상 베타세포와 같은 세포로 변화시킨다. 이 세포를 당뇨가 걸린 생쥐에 이식해 인슐린 분비와 혈당 조절을 조사한 결과 인슐린의 충분한 분비로 인해 혈당이 정상치로 조절됨으로써 연구팀은 베타 세포의 기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사람의 췌장에 있는 베타세포와 기능이 같은 베타세포를 시험관 내에서 인공 대량 배양할 수 있으므로 당뇨병 치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도의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길을 열었음을 의미한다. 죽지 않는 세포에 유전자를 넣었다가 빼버리는 방법이다.)
윤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세포는 인슐린 분비 기능이 정상세포의 50%에 가깝다. 20%만 돼도 인슐린 기능을 충분히 할 수 있다. 혈당이 올라가면 인슐린을 즉각 배출한요.
앞으로의 목표는 거부반응 없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유전형질을 찾는 것이다. 면역억제제를 먹지 않고 누구에게나 셀을 맞춰 치료하는 것이다. 윤교수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2~3년 내지 5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당뇨병 치료를 위한 베타세포의 대량 생산 기술 개발>
사람의 췌장 - 소도 분리 - 단일 세포 배양 - 유전자 조작으로 무한 증식 가능한 세포로 형질 전환 - 베타 세포 분리 - 단일 세포 클로닝 - 완전한 베타 세포 형질을 가진 클론을 찾아냄 - 증식 - SV40 T와 hTERT 유전자 제거 - 당뇨쥐에 이식 - 혈당 정상화
신앙은 나의 힘
신앙은 그의 연구와 시너지 효과를 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그는 신앙의 힘으로 연구에서 막히는 것을 풀어나가고, 지치고 피곤한 것을 이겨나가고, 좌절한 마음을 불러 일으켜 세웠다. 연구를 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은 캠퍼스 옆 숲속에 앉아 계시록에 그려진 천국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천국의 놀라운 기쁨의 향기를 맡고, 에덴 동산을 방불케 하는 모습을 그리며 연구를 계속해왔다.
젊어 대승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부인 임정자(65)씨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했다. 직계 선조가 고산 윤선도로 대대로 한학자인 집안에서 7형제의 6번째로 태어난 그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소학을 읽고 중학교 전 대학을 마쳤다. 한문을 잘하다보니 불경을 많이 읽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과학쪽으로 나간 그는 스스로를 돌연변이였죠라고 말하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불교은 내게 있어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었습니다. 특히 원효대사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약 10여분에 걸쳐 마치 그림책을 보듯 원효대사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윤 교수의 말에는 사람을 빠지게 하는 설득력과 매력이 담겨있었다. 하물며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조차 그의 정성과 열정에 두손 두발 들고 말았으랴. 그가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불교는 인간 구원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워싱턴에서 NIH에 근무할 때는 고민 끝에 야간 신학대학을 다녔다. 부인 임씨는 타이틀이 왜 필요하냐. 목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반대했다. 그는 말만 하고 생활은 실천하지 못하는 위선 많은 삶이 되기 쉬운 위험을 지적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부부는 말을 하지 않았다.
돌담에 생긴 구멍 손으로 막는 일
그는 워싱턴 DC에서 북쪽으로 60마일 떨어진 프레드리라는 조그만 타운에 주말마다 찾아가 프레드리 한인 침례교회를 세웠다. 한인이라고 해봤자 국제 결혼한 여성이 대부분인 작은 타운이었다. 생활비가 안되기 때문에 이곳에서 목회하겠다는 목사는 없었다. 2년동안 캐나다 가기 전까지 담임 목회를 했고, 단 12명으로 시작한 교회는 교인 100여명과 자체 건물을 가진 곳으로 성장해 있었다. 캘거리에 가서는 당시 한인 2천여명 가운데 50명으로 교회를 일궜다. 자연환경이 좋아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놀러가던 사람들이 교회가 더 재밌다며 캘거리 한인 침례교회를 찾았다. 떠날 때는 교인이 700명으로 늘어있었고, 교회 자체 건물도 사고 체육관도 만들었다. 일부는 인구 비례로 따지자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가진 곳이라고 일컬었다. 시카고에서는 목회 활동을 하실 계획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돌담에 생긴 자그마한 구멍을 손으로 막는 일을 하겠다고 답했다. 목사님들이 하지 못하는 영역을 담당하겠다는 말이다. 그는 수십년간 목회 활동을 해오며 일체 돈을 받지 않았다. 모두 자원봉사였다.
현재 그는 레익 포레스트에 위치한 미국 교회에 다니고 있다. 신앙이 첫째인 이유에 대해 그는 지상생활 천년하는 것 아니니까요. 백년 미만의 생을 살며 육을 벗어버릴 때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답했다.
일은 즐겨라
연구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전세계의 쟁쟁한 대학, 쟁쟁한 사람들과의 경쟁의 세계다. 조금만 쉬어버리면 금방 뒤쳐지게 된다는 것이 윤 교수의 설명. 그가 건강을 중요시 여기는 이유 중 하나도 연구를 위해서다. 오전 9시 연구실에 나오는 그는 자정까지 연구실에 머문다. 저녁식사는 집에서 하는데 1분을 아끼기 위해 부인이 차려놓은 식사를 마치고는 곧바로 연구실로 돌아온다. 지구 반대편 일본 연구자들과 공동 연구를 하기 때문에 인터넷, 웹사이트, 웹캠 등을 이용해 새벽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다. 점심 먹고 30분, 저녁 먹고 30분 운동을 매일 한다. 과거 군대에서 태권도를 가르친 경험이 있는 그는 이 때 배운 방법으로 몸을 푼다. 일요일에도 목회 활동이 끝나면 연구실로 돌아와 연구를 계속한다. 자신을 이끄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첫째는 정신이고, 둘째는 일을 즐기는 것입니다. 인간 살아가는데 마음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머리를 푹 쉬게 하고 마음을 키우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일을 즐기기 위해서는 ‘머리 아프다’ ‘힘들다’ 불평하면 할 수 없죠. 일에 미칠 정도로 즐기기 때문에 일에 대한 부담감이 없습니다.
윤 교수의 조언, ‘Joyful Monday’
그가 국립보건원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가장 싫어하는 요일은 월요일, 좋아하는 요일은 일요일이었다. 한국인에 주립대학 졸업생이었던 저와 예일대, 하버드대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동료들과는 경쟁이 안됐습니다. 일을 시작해야 하는 월요일에는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고, 교회에 나가는 일요일에는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이대로는 내 장래는 뻔하다는 생각이 든 그는 ‘월요일을 즐기자’는 생활 지침을 세웠다. 이력서가 따라다니는 이 바닥에서 첫 직장에서 흐지부지하면 다른 곳에서도 막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당장 실천에 옮겼다. 일요일 교회에 다녀온 직후 직장에 가서 연구실을 책상에서부터 싱크대까지 먼지 하나 없이 오후 11시까지 정리하고 집에 돌아왔다. 월요일 아침 출근할 때가 가면 깨끗한 직장에 가고 싶어 콧노래도 났다. 미국인 동료들은 월요일 출근해 커피마시고 수다떨고 정작 화요일에야 발동이 걸리는데, 그는 하루 더 빨리 한 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칭찬을 많이 받았죠. 우리 보스가 정부측 손님이 오면 꼭 우리 방을 구경시켜주곤 했습니다. 다른 연구실은 ‘돼지우리’라고 부를 정도로 지저분했지만 우리 연구실은 항상 깨끗했으니까요. 이어 윤교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해서는 생각과 환경을 동시에 바꿔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이 내 삶의 철학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윤지원 교수는...
윤지원 교수(70)는 부산 조선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미국에 와 2년간 초빙 연구원으로 일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20대 후반의 나이에 조선대 의학대학 초창기 의예과 과장이 됐다. 생리학 부교수를 하다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71년 코네티컷 주립대에서 석사 과정으로 유전학 & 세포 생물학을 밟은 후, 73년 동대학에서 박사과정으로 면역과 병동학으로 마친 그는 곧바로 74년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스태프 펠로우로서의 일을 시작했다. 2년 후 시니어 스탭, 다시 2년 후인 78년 수석 연구관의 자리에 오른다. 미국 정착 7년만의 일이다. 디렉터스 어워드에도 선정됐다. 국립보건원에서 10년간 근무하다 캐나다 캘거리 의과대학에 당뇨병 소장으로 초빙됐다. 2001년에는 캐나다 수상이 임명하는 캐나다 정부 석좌 교수가 됐다. 캐나다 내 교수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교수에게만 주어지는 자리다. 로잘린 프랭클린 시카고 의대에는 2년전 오게 됐다. 김 교수가 이곳에 오래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암센터인 뉴욕 주재 슬론-케터링 메모리얼 암센터에서 1년간 연구원으로 있을 때 그 때 우연히 김교수를 복도에서 만났다. “한국 사람이십니까”라는 대화가 김교수와의 첫 번째 대화였다. 같은 크리스챤인 김교수와는 20년간 우정을 나누었고, 하버드, 코넬, 예일 의대에서 오라는 초청도 많았지만 김교수와의 가까운 사이. 제가 오면 힘도 되고, 김교수님이 원하는 것은 학교의 명성을 높여달라는. 김교수님은 20년 이상 이 학교에 있었고 학교를 무척 사랑하는 분.
1998년에는 KBS 방송사가 주는 한국을 빛낸 해외동포상 중 학술상을 수여했다. 자연 인문 영역을 통틀어 단 1명에게만 주는 귀한 상이다. 2000년에는 호암의학상을 수여했다.
그는 미국 유학 오기 전 한 번 만난 후 순수하고 수수한 모습에 반해 결혼했다는 임정자(65)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그를 닮아 두 아들은 MIT와 캐나다의 MIT라 불리는 오토루대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2년전 시카고로 이주해 온 그는 버논 힐스에 거주하고 있다. 송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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