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에서 날아온 보도에 의하면 금세기의 성녀(聖女)로 칭송되던 테레사 수녀의 시성(諡聖) 절차가 마무리 단계인 것 같다. 8년 전 테레사 수녀가 타계했을 때 그 전 주 내내 구미를 광적으로 흥분시켰던 영국의 황태자비 다이애나 횡사의 비보와 대비, 매스 미디어의 보도자세가 가치관의 대위(對位)에서 균형을 잃었다는 비판이 높았었다.
마더 테레사는 알바니아계의 카톨릭 수녀로 일평생 인도 캘커타에서 빈민구제 활동에 헌신해 생존시 성인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아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2003년 10월19일에는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福者) 반열에 올랐었다.
테레사 수녀의 봉사가 세계 최하의 나락, 인도 캘커타의 빈민굴에 혼신을 던진 진정 숭고한 ‘인류애’의 표상이었다면, 다이애나의 ‘봉사’는 세계 최고, 대영제국 황실의 도덕적 이미지 제고를 위한 동정심의 과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내용과 외관, 본질과 표피, 실상과 전시의 극적인 대조였다. 다이애나가 시각적 스펙터클이었다면 테레사는 정신적 감동이었다. 이 두 ‘사건’이 투영하는 각 이미지의 본질은 비교 그 자체가 불가능한 논리적 방정식의 잣대 ‘밖’의 양극에 속한다.
그러나 일부 언론, 특히 서구 언론이 이 두 사건을 다룬 비중의 가치 전도(顚倒), 혹은 가치편향적 자세는 매스미디어의 상업주의적 속성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한 마디로 다이애나 공주에 대한 서구 언론의 보도는 히스테리의 발작이었다. 미국의 저명한 지성 언론인 조지 윌은 뉴스위크의 칼럼 ‘The Last Word’에서 구미 (그는 굳이 대서양 국가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언론의 보도 자세를 “진부하고 상투적인 허풍의 쇼”라고 꼬집었다. 그는 다이애나의 추모록에 이름을 적기 위해 런던의 켄싱턴 궁 주변에 밤새 줄을 서고 있는 인파와 워싱턴 매사추세츠 가의 영국 대사관 계단에 산적한 꽃다발 더미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는 데 고심했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한 고인(故人)의 생애에 대해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미지를 흰 캔버스에 제멋대로 그려 넣는 작업의 경쟁이었다”고 그는 언론의 보도자세를 꼬집었다. 관객은 그 그림에서 나르시시즘을 느끼며 대리만족에 흠뻑 도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명 비평가들은 우상을 쫓는 현대인들의 이 같은 집단 히스테리를 ‘문화적 포말 현상’이라고 말한다. 신화를 잃은 현대인들의 이 광적인 집단 히스테리는 일찍이 나치즘을 낳았고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현란한 인육(人肉)의 카니발을 즐겼다. 그리고 전쟁의 공포에서 해방된 전후세대는 ‘데이탕트’가 가져다 준 나른한 긴장해이 상태에서 대장관(大壯觀)의 스포츠 게임과 록 뮤직, 수십만의 집체적 결혼, 신비한 사교(詐敎)적 대 집회 등에서 새디즘을 탐닉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기 데보르는 현대를 ‘대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규정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현대인은 문명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대중은 그것이 유대인 학살을 규탄하는 뉴렘버그의 집회이거나 로크 음악 콘서트이거나, 혹은 대형 스크린에서 명멸하는 할리우드의 영상적 곡예이거나, 이들이 제공하는 내용의 ‘가치’와는 전혀 무관한 ‘쇼’ 그 자체에 도취한다.
세계화로 미화되고 있는 신제국주의의 약육강식, 이에 따른 문명충돌, 미국의 이라크 침공, 한반도 분단에 따른 동북아에서의 중미의 갈등, 그리고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환경파괴에 대한 대책소홀 등에서 보듯, 현대인들은 가치관의 몰락으로 인해 ‘자전거 사고’와 ‘문명의 충돌’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분별력을 잃어가고 있다. 바로 언론의 목탁으로서의 기능이 거세되었기 때문이다.
일정 기간 제한적 조건에 갇힌 인간은 그 환경에 적응해 새로운 피사체에 대한 조건반사에서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현대문명에서 조건제한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언론이다. 박정희 소장의 군사정권이 세운 파쇼적 질서가 청와대 안가의 주지육림에서 터진 몇 발의 총성으로 3공이 몰락한 지 26년이 지난 오늘도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언론의 조건부여 역할 때문이다. 대중 스포츠가 만든 우상 O. J. 심슨이 미국의 법질서를 코미디로 만든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의 언론은 이제 구질서 홍보기능의 구곡(舊穀)을 벗고 새 가치의 창조에 앞장서야 할 때가 되었다.
언론은 ‘횃불‘이다. 따라서 언론은 의(義)와 불의, 도(道)와 부도, 절(節)과 변절, 지(志)와 상지(喪志), 예(禮)와 비례, 그리고 선악, 영욕, 이해(利害), 용치(勇恥) 같은 상반된 기조에서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의, 도, 절, 지, 예를 인간의 기본적 가치로 표방하는 역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sLee-kpi@msn.com
이선명/KPI통신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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