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터리 한 복판에서 약장사가 약 팔던 내용까지 훤히 외울 정도로 놀았던 그곳도 지금은 조그만 꽃동산으로 변해 있었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다는 핑계로 20여년 만에 고향을 방문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늘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어릴 때의 친구들을 찾아보고 추억 어린 동네를 보기 위함이었다.
먼저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제기차기, 구슬놀이, 딱지놀이를 하면서 뛰어 놀았던 영선동 동네어귀를 찾아보았다. 30년 가까이 살았던 우리 집은 이층 양옥으로 변해 있었고, 그 동안 주인도 서너 번이나 바뀐 것을 알게 되었다. 길 건너 아랫길 골목에는 작은아버지 댁이 있었다. 나의 유년시절은 작은 아버님 댁 장독대 주위에 있던 넓은 꽃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봄부터 늦가을까지 화려하게 피어 있었고, 몇 마리의 닭과 오리도 함께 있었다. 그 집도 콘크리트 슬라브 집이 되어 있었고, 옆집에 같이 살았던 고모님 댁도 음식점으로 변해 있었다. 특히 윗동네의 큰아버지 댁과 쌀집을 운영했던 오촌 댁 주변 전체는 넓은 주차장으로 바뀌어져 있어 머리 속으로만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 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서 1킬로 정도 가면 봉래산 중턱에 복천사라는 절이 있었다. 봄이면 친구들과 산에 놀러가서 진달래꽃을 따먹고, 유난스럽게 뻐꾸기가 울어대는 절 주변 웅덩이에서 개구리와 올챙이를 잡아 놀던 그곳. 지금의 복천사는 주변 전체가 주택가로 변해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집 앞으로 오고가는 버스길 중앙에다 돌무더기를 만들어 버스운전사들을 애먹이고, 버스 뒤를 친구들과 함께 붙들고 다음 구역까지 매달려 가면서 위험한 곡예놀이를 했던 그곳도 이미 도시화가 되어 있었다.
여름이면 옆 동네 애들과 연날리기, 새총싸움, 말타기를 하며 놀았던 이송도 바닷가. 돌덩이 위에 옷을 홀라당 벗어 놓고 물놀이를 하며 성게, 고둥, 홍합, 게를 잡고 놀았다던 그곳. 높은 돌덩이에서 아래 시퍼런 바다를 향해 뛰어 내리고, 개헤엄을 배워 돌덩이 사이를 퐁당거리다가 나중에는 평영에 익숙해져서 먼 곳에도 하얀 물거품을 차올리며 곧잘 헤엄치고 다녔다. 썰물이 되면 조그마한 웅덩이의 물을 손바닥과 고무신으로 퍼내고, 그 속에 있던 고기들을 잡아 고무신에 넣어 놀았던 주변 일대는 간척공사 후 공장지대로 변해 있었다. 저녁이 찾아오면, 바닷가 인도 안쪽으로 홍합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포장마차 주변은 손님을 부르는 소리, 기생들의 웃음소리, 밥상을 두들기며 노래부르는 소리까지 파도와 함께 어울렸던 포장마차들도 10여 년 전에 다 뜯겨 났다고 한다. 지금은 바다를 거닐다 쉴 수 있는 벤치가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가을이면 이송도 언덕길을 따라 구(IA) 해양대학이 있던 동삼동에 가면서 도토리를 주워 아무 곳에나 둘러앉아 “가위.바위.보”하며 따먹기 했던 그곳. 풀숲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아 주전자에 모았다가 구워 먹고, 날씨가 맑은 날이면 일본 대마도가 보이는 바닷가 언덕과 등대에서 낚시를 했었다. 바람이 불면 사방으로 춤추는 갈대와 코스모스 꽃 위로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으러 쫓아다니고, 종이 비행기를 접어 바다로 향해 날려보내고, 동네 아이들과 쌍방으로 나눠 말타기하며 뛰어 놀았던 그곳도 지금은 무수한 자동차들이 질주하고 있고, 고층 아파트만 하늘 높이 들어 서 있었다.
겨울이면 윗 로터리 양지바른 곳에서 동네 친구들이랑 구슬 따먹기하며 놀았던 그곳. 로터리 한 복판에서 약장사가 약 팔던 내용까지 훤히 외울 정도로 놀았던 그곳도 지금은 조그만 꽃동산으로 변해 있었다. 해녀들은 추운 겨울에도 긴 휘파람을 불며 잠수해서 소라, 성게, 멍게, 해삼, 청각 등을 건져 올리고 장작불에 모여 앉아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던 바닷가. 건져 올린 해물을 즉석에서 팔았던 그곳도 파도만 철썩거릴 뿐 해녀들이 사라진지도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산에서 물줄기가 바다로 향해 흘러내리던 함지골도 둘러보았다. 그 곳에는 빨래터가 여러 곳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종종 그곳에 갔었다. 빨래 방망이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멀리 퍼지는 것을 듣고는
“엄마. 누가 저렇게 세게 빨래를 하지?”
“저 소리는 골짜기에서 되울려 나오는 메아리란다.”
어머니는 돌덩이 몇 개를 모아 밥솥을 걸치고 밥을 해 먹으면서 빨래를 하시고, 씻은 옷가지는 큰 돌덩이에 걸쳐 햇볕과 바람에 말렸던 그곳. 나는 달밤에 반딧불을 잡아 “친구야. 하나도 안 뜨겁다. 그자”하면서 푸른빛이 나오는 엉덩이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던 그곳도 매립공사 후 사격장과 커다란 카페 하나가 우두커니 들어 서 있었다.
산이며 바닷가를 거닐고 뛰어 놀았던 그곳과 초등학교 건물과 동네에서 뛰어 놀았던 그 장소가 지금은 왜 그리도 좁고 협소해 보이는지. 그토록 친했던 충조와 봉수, 귀화의 소식은 여러 곳을 통해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재잘거리며 떠들고 뜀박질했던 친구들은 지금 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하기 그지없다.
5일 동안이나 이곳 저곳의 유년지를 찾아 조그만 파편 하나라도 찾아내려 했으나 내가 찾은 것은 없다. 막연하나마 어떤 그리움을 대변 할 편린이라도 건지려 찾아 가보면 ‘이게 아니었는데..’하며 빈 가슴만 후볐다. 도리어 낮선 거리와 낮선 집들로 변해 있는 모습에 나는 북받쳐 오르는 슬픔과 허탈감만 더해 갔다. 나중에는 ‘고향과 친구들의 그리움은 차라리 가슴에다 그냥 묻어 둘걸. 괜히 찾아 왔구나’하며 후회까지 하고 말았다. 다시 만난 몇몇의 동창생을 보고는 어릴 때 기억을 한참이나 꺼내어 주고받고서야 알 수가 있었다.
고향과 친구에 대한 그리움은 이렇게 세월의 흐름에 쓸리어 멀리 사라져 가고, 기억 속에서만 맴돌고, 동네 아침을 깨우던 재첩장사의 구성진 목소리마저 들을 수 없어 세월의 무상함만 느끼며 돌아선다. 자꾸 가슴이 아파 오며 빈 기침만 나온다.
강 정 실
약 력
수필시대로 등단
재미수필가협회·수필문학진
흥회 회원
재미사진작가협회·한국
사진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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