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여사 앞에 나타난 상만씨의 모습은 말쑥했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이 보여지는 외모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일이 아니던가. 옛날의 볼품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눈에 척 봐도 높은 지위에 있는 기품이 느껴졌다.
나 여사는 실타래처럼 엉킨 감정을 좀처럼 추스르질 못했다. 나이 오십 평생에 그런 모욕을 느껴보긴 처임이었다. 이 나이에 무엇을 어쩌겠다고, 정신이 잠시 나갔던 거라고 가슴을 쓸어 내렸지만 농락 당했다는 불쾌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착각에 빠져있었던 자신을 변명 하면 할수록 얼굴을 가열된 히터에 파묻은 것처럼 확확거렸다. 커 가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택도 없는 수입에 한 푼이라도 보태려고 시작한 것이 보험 세일즈였다. 아는 친척은 물론이고 조금만 안면만 있으면 체면 불구하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우연히 찾아간 사무실이 옛날에 같은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오빠의 사무실이었다니. 할 일 많은 세상은 넓고도 좁았다. 뜻하지 않게 동네 오빠를 만난 것은 그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며칠 후 받아든 전화 한 통화는 옛날 나 여사를 죽자고 쫓아다니던 상만씨로부터였다. 상만씨의 첫사랑이 바로 그녀였다는 것을 알고 고향 오빠는 그녀를 만난 즉시 상만씨 사무실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상만씨는 그녀를 당장에 만나고 싶어했고 그녀도 비즈니스 차원이라고 내심 다짐하며 약속장소에 나갔다.
나 여사 앞에 나타난 상만씨의 모습은 말쑥했다.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이 보여 지는 외모에 의해 결정되는 순간적인 일이 아니던가. 옛날의 볼품없던 모습은 사라지고 한눈에 척 봐도 높은 지위에 있는 기품이 느껴졌다. 괜히 주눅이 들은 나 여사는 모조 오팔반지가 끼어져 있는 손을 오그리며 다른 손으로 그가 건네주는 금테 두른 명함을 받아 들었다.
“XX 해운회사 상무” 박 상만 그날 저녁 한적한 계곡 옆에 자리 잡은 음식점의 오리고기는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상처를 해서 혼자 살고 있다는 상만 씨의 목소리는 떨어지는 물소리에 파묻혀 들릴 듯 말 듯 애처로웠다. 상처를 해서 혼자된 몸이라니, 나 여사는 주름진 손으로 맥주 잔을 만지작거리며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었다. 헤어질 무렵 상만 씨는 나 여사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으며 가끔씩 만나자는 말을 귓전에 속삭였다. 나 여사는 설레었다. 뭉개져버린 지난 시간들이 어리석었다는 회환이 주체할 수 없이 몰려왔다. 황혼 이혼 , 그것도 나쁘지 않지, 우리 나라 이혼율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지, 남들도 이혼을 밥먹듯 하는데 나라고 못할 이윤 없지.
비즈니스 관계상 늦은 귀가야 이미 일상사가 된 일이었지만 뒤늦게 철이 든 나 여사는 상만씨와 함께 알프스, 벨라지오, 파라다이스, 할러데이를 순회하며 때늦은 열정을 불태웠다. 하늘은 그런 내숭에 벌을 내린 것일까 아니면 복을 허락한 걸까.
나 여사의 남편이 심장마비로 돌연사 해버렸다. 주위 사람들은 혀를 차며 혼자 어떻게 아이들을 키우냐며 동정했다. 그러나 나 여사는 죽어버린 남편이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그 동안 남편에게는 충분히 자신이 할만큼 도리를 다했다는 계산까지 앞세웠다.
나 여사는 상만 씨에게 남편의 부고를 제일 먼저 알렸다. 장례식이 끝나자 마자 이제는 그녀 쪽에서 적극적으로 만나자는 말미를 먼저 꺼냈다. 그녀는 죄책감도 없이 홀가분하게 만날 수 있는 모처럼의 약속에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옷장을 뒤지며 갈아입고 벗고를 반복하였다. 시간은 흘러가기도 전에 굳어버린 용암처럼 느릿느릿 흘렀다. 퇴근시간에 맞추어 상만씨 사무실 부근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후쩍후쩍 앞서 걸어가던 상만씨가 이끄는 식당은 찌든 때로 끈적거리는 싸구려 테이블이 놓인 조그만 백반 집이었다. 상만 씨는 대뜸 동태찌개 백반 두 개 주세요. 알프스에서 와인 잔을 건네주던 매너는커녕 멋대로 제일 싼 동태찌개 백반을 시키다니, 나 여사는 자존심이 있는 대로 구겨져 울고 싶을 지경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텔에 딸려있는 레스토랑에 갈 줄 알고 하얀 색 롱 원피스에 흰색 모자를 썼던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나 여사를 쳐다보았다. 백반 집이라니. 기껏 맛있는 거 사준다고 생색을 내며 끌고 온 곳이 고작 이곳이란 말인가.
치사한 노오옴, 유치한 노옴. 나쁜 놈부글부글 끓는 속은 뜨거운 동태찌개 국물로 더 활활 거렸다.
-끝-
권소희
약 력
한국소설로 등단
한국 소설가 협회, 국제 펜클럽, 미주 크리스찬 문협회원
단편 ‘시타커스, 새장을 나서다’ ‘마지막 남은 자유’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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