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인들의 민주운동
▶ 고세곤 <전 재미구국향군 사무총장>
20명의 예비역 장교가 뉴욕의 삼복정에 모여 재미구국향군을 창립하게 된다. 교포사회는 독재에 항쟁하는데 회피적이어서 동지 규합이 제일 어려운 난제였고 이상한 눈초리로 보는 사람이 태반이요 군사문화에 젖어서 서방식 민주주의는 외면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한국 정보부는 민주화 물결을 차단하고자 미국까지 침투해서 정보망을 가동하고 민주운동가를 탄압하고 교포사회를 분열시켰다.
민주투사들을 용공주의자라는 허위조작된 감언이설을 하고 민주인사를 모함과 중상으로 인격적인 살인을 일삼고 있었다. 당일의 창립선언문은 군의 민주화로 한국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골자였고 6.3사태의 주역이던 김중태의 축사로 민주화투쟁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는 당시 6.3사태의 주동멤버여서 박 정권을 반대하다 미국으로 추방되어 뉴욕에서 망명 중이었다. 구국향군이란 명칭으로 사령관 최석남(육사 12기), 부사령관 장석윤(육사 11기), 참모장 고세곤(육사 15기), 그리고 각 도시마다 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상부조직은 쉬웠으나 하부조직이나 지방 조직은 무인지경인지라 동지를 구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사령관 최석남은 사학자로 이순신 장군 연구로 이순신 상하권의 저자요 정치세계와는 전연 관심과 인연이 없었고 민중을 먼저 생각했던 선비형이요 학구적인 생활태도를 지녔다. 군사혁명 후 군이 권력의 보호장치로 전락하자 그것을 비판하다 브라질로 추방당한 것이다. 유신 정부는 민주장교만 축출했으며 도태시켰고 민주인사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유신체제는 거대한 권력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과시하면서 민중, 민주진영을 계속 압박하고 회유했다. 지성인과 엘리트까지 유신권력과 결탁하고 그 이익을 나누는데 혈안이 되었다. 한국사회는 오도된 가치관에 혼란과 비탄에 빠졌고, 인간을 경제동물로 예속시켰다. 우리는 제1차 투쟁목표로 뉴욕 UN빌딩 앞 광장에서의 데모로 시작했다. 유신에 정면 도전하는 데모로는 너무나 미약한 비록 6명이란 단촐한 수이나 전원 예비역 장교들로 상당한 의미를 주었고 군 출신의 최초 유신반대운동이라는데 주목을 끌었다. UN이란 세계기구에 유신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제동지들의 연대를 이루었고 호응도는 더욱 좋았다. UN 회원국에 주지시켰고 동시에 뉴욕 한인사회도 동토처럼 얼어붙은 마당에 20만 교포들에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뉴욕의 UN에 올린 봉화를 들고서 사령관 최석남과 참모장 고세곤은 LA지부 조직을 향해 갔다. 정치경험이 전연 없는 군인출신들로는 비행기에서 이리저리 궁리해도 별 묘수를 찾이 못했다. 그래도 희망을 걸었던 것은 LA는 항일의 후예들이 아직 건재한 때라 좀 기대를 걸어보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반대로 군사독재의 아성이나 별반 차이를 못 느꼈다. LA는 동양인이 많아서 그 영향이 크고 아시안 세가 눈에 띄게 활발했지만 한인사회는 그 중대한 본국의 유신 문제만은 노코멘트 하는 독재의 해외 거점 같았다. 미국 최대의 한인인구 밀집지역이라지만 이념과 사상이 같은 동지란 희귀할 뿐 찾다가 지쳐서 돌아설까 망설이기도 했다. 모래 속을 아무리 찾아도 나오는 것은 겁쟁이만 나오고 민주동지는 못 만났다.
그러나 73년 초 김상돈 선생(전 서울 시장)이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온 것은 미 서부에 민권운동의 불길을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김상돈과 이용훈, 차상달은 초기 LA 민주운동의 리더들이다. 최 장군과 나는 의욕과 뜻만 믿고 시내 곳곳을 누비었고 주유소와 식당을 상대로 전단을 나누어주고 구국향군 캠페인을 벌였다. 군의 옛 동지들에게는 전화로도 호소하고 민주주의 싸움은 결코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감을 주익도 했다. 가장 우리를 실망시켰던 부류는 자기는 정치엔 관심이 없다는 데 있었다. 이들은 권력이나 지위엔 관심이 너무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민중 구출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스러운 우리의 최대과제로서, 받아들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5일간 밤낮으로 전력투구해서 지부 창설에 나온 동지가 20명이 되었을 때 사령관 최석남과 본인 참모장 고세곤은 너무나도 감격했다. 어느 날 밤 육사 선배 유종호 씨가 찾아와 격려를 해준 일은 영원한 기억으로 남았다. 유 선배는 민주화운동에 같이 참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회의는 이정빈 목사의 축도가 있고 임원 선거에서 우리는 김일우(예비역 대령)를 지회장으로 선출했다. 최석남 사령관은 축사에서 이제 구국향군은 두 날개를 갖고 날 수 있게 되었다고 격려했다. 서부 조직이 나오며 조국의 군대 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향수에 젖는 수는 증가하고 떠오르는 아침 햇빛처럼 군에는 희망을 주었다. 그날 밤 하마터면 이 감격은 사라질 뻔했다. 호텔 방에 들어온 도적은 우리 민주운동에 고나한 서류 일체와 가방까지 가지고 갔다. 모든 의심은 LA 한국정보부가 받아야만 했다. 유신 정부는 LA의 민주화 운동을 막고자 교포사회 전반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부에 돌아와서 곧바로 뛰어든 사업은 동아 자유언론을 돕는 운동이었다. 재미 구국향군 사령관 최석남과 참모장 고세곤 두 사람의 이름으로 연속 광고를 실었고 독재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했다. 광고탄압을 받고 있는 동아를 사수하여 민주화에 보탬이 되자는 우리의 충정이었다. 구국향군의 재정은 너무도 빈약했고 광고비를 오래 충당치 못했다.
당시 미국인 신부 시노트는 동아 언론을 살리는 데 끝까지 항쟁 광고를 내었고 우리는 지상의 동지였다. 그 후 그는 인혁당 사건에서 죽은 형제들에 대한 부당한 판결에 도전했다. 그리고 추방 명령까지 받은 것이다. 우리는 75년 3월 워싱턴에서 지면 동지에서 매일 만나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한국의 십자가를 진 하나님의 사도이다. 시노트는 미국 NCC의 Korea De나에 한국 인권담당으로 일하면서 프레이저 위원회에 증언연사로 활동했고 전국의 순회강연하고 인국 인권 실태를 주제로 국제적으로도 운동을 확장해나갔다. 시노트는 한국 미주주의의 은인이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국제 인권단체와 만나게 되었다.
필리핀 동지들과도 유대관계를 맺은 것도 이때의 일이었고 한 비 연합데모가 백악관 앞에서 열렸다. 나는 세계은행의 후진국 경제착취를 비판하는 데모에도 참가했다. 세계은행은 독재자를 도왔다. 독재의 권력 연장에 이용당했고 그들 나라의 부패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필리핀 동지들과 독재타도란 공동 관심사를 나누고 동지적으로 협조해나갔다. 1976년 8월30일 백악관 앞 데모는 국제적으로 이름난 민권투사 제시 잭슨 목사, 맥나팔스(전 필리핀 외무장관)도 참석했고 아퀴노 필리핀 상원의원과 그의 부인(그후 대통령이 되었음), 그리고 미국 의원출신과 전 구국향군 동지들과 최덕신 장군도 동참시켜 국제적으로 결속을 보였던 데모였다. 우리는 한국 유신 타도를 주장했고 한국 대표로 본인이 인사말을 했다. 민주주의의 쟁취에는 한국이 먼저 앞서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데모가 끝날 때 아퀴노 상원의원의 초청을 받았지만 아깝게도 성사되지 못했다. 그 후 한 달만에 그는 필리핀 마닐라 공항에 내렸으나 숨어서 기다리던 비밀경찰의 저격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는 아시아의 민주투사였다. 필리핀 동지들과는 민주회복의 경쟁관계였는데 그 이유는 군사독재란 상황이 유사했고 장기 독재와 정보정치도 흡사하였다. 필리핀은 국민의 총력전으로 우리보다 먼저 민주화를 쟁취했다. 필리핀의 민주화는 그 사회 지식인의 민주투쟁심이 강했고 천주교의 절대적 지지가 있었다.
나의 활동은 개인생황에도 영향이 컸다. 또 나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도 부담이 되었다. 나의 처가 미 연방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 나는 뉴욕에 사업 목적으로 올라갔다가 민주동지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유남근 의사이며 후엔 뉴욕 구국향군 지부장도 맡았다. 그는 유신 반대운동이 있는 날이면 병원 문을 닫고서 나오는 열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워싱턴 프레이저 청문회에 초청했고 그날 유신 주구 김경원을 혼낸 일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고세곤 <전 재미구국향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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