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인들의 민주운동
▶ 고세곤 <전 미주구국향군 사무총장>
광주의거 바로 다음해인 81년 3월3일 백악관은 한국의 신군부 지도자를 초청했다. 레이건 대통령은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우대한다는 관례를 따라 초청했다. 광주를 습격한 정치군인들이 몰려온다는 불길한 예감으로 나 자신 착잡했고 동포사회도 찬 반으로 양분되었다.
친 정부 동포들이 환영위원장 감투를 놓고 이견으로 양파 싸움으로 대립하는 해프닝은 큰 웃음거리가 됐다. 환영인사들은 광주의거의 민주열사를 인정치 않는 파렴치한 사람이어서 본국의 민주화까지도 부정적이었다. 광주 민주화투쟁은 거족적인 의거이다. 민족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은 숭고한 투쟁이었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광주의거의 영웅들의 피와 땀의 대가이기도 하다.
당시 친 정부 그룹은 대사관이 있어 자주적으로는 서지 못해서 결정을 못하고 관의 낙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만 해도 한국의 외교는 권력기관의 통제하에서 독자적인 정책개발은 못하고 통제란 굴레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당시 레이건 정부는 카터가 쌓은 인권정책을 취소하고 냉전을 대결로 대체했다. 미국의 국방예산도 상승시키고 반공정책으로 한반도에 군사안보 책임자를 물색하고 있었다. 군사독재자는 미국의 핵우산의 보호를 받아서 군사면에서 안전했다. 그런 안전은 분단의 아픔을 깊게 했다. 독재권력을 구축하는데 이용했다. 국내는 민주주의의 희망을 잃어갔다. 미국은 팟쇼 정치도 묵인하는 우를 범했고 군사정보정치를 유지하고자 한반도 요새화란 작전계획을 수행하는 데엔 전두환 장군이 적당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일단 무력 앞에서 좌절되어 갔다.
미국의 아시아 전초를 장악한 전두환은 광주의 민중을 압살하고 과거 독재의 주구들과 한몸을 이루어 제2기 독재의 아성을 계승해갔다. 레이건 정부는 정권의 합법성 같은 원칙은 무시했고 자국이 원하는 군사대국주의의 새 전략개념에만 집착했다. 그 1차 목표는 한반도에서 유사시 전초기지로서의 준비를 점검하고 대량무기 도입을 서둘렀고 한반도는 화약고가 되어갔다. 레이건의 보수주의는 전두환의 정권유지를 가능케 했고 신군부는 군사작전을 정치에 적용하는 강대국과의 주종관계로 내려앉게 됐다.
동포 가운데 상당수는 박정희 시대의 세뇌로 옳고 그른 것조차 인식 못하는 멘탈리티가 널리 파급되고 있었다. 자기는 미국의 자유체제에서 자유를 누리지만 타인의 자유엔 무관심이었다.
전두환 독재정권은 한국 재벌의 풍부한 재력을 업고 반대데모를 최소화하는데 버스 60대를 동원하여 환영식에 오는 사람의 불편을 없애고 호화판 파티장으로 초청했다. 이들은 관제동원으로 나온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평소에는 보아도 못 본 척 했던 사람들도 이날은 구름처럼 나타난 것이다. 다수 동포는 대사관의 초청을 영광으로 아는 관존민비 시대의 관행이 여전했다. 마치 구 자유당 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 워싱턴은 서울의 복사판이었고 신학문을 접한 지성인도 시대정신을 외면하고 구습을 쫓는 극단의 자기안일이란 퇴폐주의가 더 깊었던 시대다. 전두환 정권은 천문학적인 홍보비를 썼다. 광주의거 민주시민을 살해한 죄과로는 이미지 개선은 절대 불가능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방미 첫날 행사는 레이건-전두환 회담이었다. 회담은 아침 10시에 시작이 되었다. 우리의 데모는 백악관 앞 공원에서 열렸으며 백악관 일대는 우리의 데모로 진동했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날 이상한 전화가 내게 왔다. 자기는 백악관 경호 책임자인데 데모에 무기를 휴대하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받은 것이다. 데모장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원래 정보원들의 거칠고 고압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냥 흘리기엔 무엇인지 석연치 않다고 생각되었다. 물론 나는 그 정보원에게 당신이 오해를 한 것 같다고 설명을 해갔다. 나는 인권과 자유투쟁가이다. 인도의 간디의 비폭력투쟁을 원칙으로 한다고 일러주었다. 민주인사들의 데모는 늘 신사적이었고 우리 민주진영은 수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우리 민주인사들은 폭력을 휘두를 만한 사람도 없었다. 미국의 집시법에는 통달해 있었다. 데모 당일 그는 나타나 한마디로 인사는 간단히 했다. 당신이 바로 데모 책임자냐는 한마디뿐이었다. 그렇소, 그는 장신의 건장한 사나이였다. 검은 안경을 낀 이 무뚝뚝한 사나이는 슬금슬금 나에게 접근하고는 그의 큰 손으로 나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나는 아찔했다. 무엇인가 나를 꽉 죄고 있었다. 위협을 느꼈다. 아마 한국대사관의 제보가 옳은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무기를 체크한 것이다.
이보다 더한 일도 했다. 데모가 한창 잘 나가는데 우리의 후면에는 통일교 광신자들이 모여 우리를 향해 데모를 한 것이다. 친북이니 평양으로 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민주데모를 파괴하는 친정부의 교란작전이었다. 정보부의 주구들이여, 당신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만년 군사독재의 들러리만 설 것인가. 종교를 가장한 상업단체의 내막은 이미 박동선 로비 조사에서 사이비로 밝혀졌다.
81년 초가을 2차 방문 때의 일이다. 데모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투쟁동지의 결속이었다. 데모는 필라로 옮겨갔다. 본인은 필라 시청에 가 필라 동지와 합류했다. 뉴욕과 LA도 워싱턴 못지 않게 반대데모는 격렬했다. LA는 김상돈 선생이 직접 진두에 나섰다. 그는 한국의 이름난 민주투사이시고 민선 서울시장을 지낸 노장이지만 군정 반대의 선봉이요, 총지휘자였다. 선생의 생애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군정타도 운동으로 독재와의 투쟁이었다. 아깝게도 그 당시 서부의 민주대열은 열세였다.
참여율이 낮아서 우리 데모대는 고민 끝에 마침 미국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연대투쟁을 가능케 했다. 전두환 일행의 LA 비행장 도착시 한국 정보원들의 무술 공격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날 데모대는 정보부의 무술단과 일대 격전이 벌어져 부상자까지 났다. 서글픈 이야기다.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민중들은 미 전역에서 다 일어났다.
그는 귀국 후 미국의 각 도시와 친선을 맺고자 자매결연이란 민간외교를 추진했다.광주시를 미국의 애틀랜타와 자매결연을 맺게 하고 제1진으로 광주 시장과 그의 참모들을 보냈다. 나는 저들이 워싱턴에 오는 시간 덜레스로 나갔다. 저들을 위해 나온 버스에 올라탔다. 나는 시장과 같은 자리를 하고 광주의거의 희생자와 군사무력집단의 잔인성을 비판했다. 그는 군정에서 임명받은 시장이었다. 그는 도무지 입을 열지를 않고 차 문 밖만 바라볼 뿐 얼굴조차 대지 아니 했다. 그 사이 버스는 한국식당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게 됐다. 나는 광주 원흉을 고발하고 광주를 배신하고 정치군인의 주구는 바로 당신들이라고 소리를 높였다. 나는 광주 영웅들의 피를 더럽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권력의 시녀들이여 회개하라는 말로 이날의 일과를 마쳤다.
고세곤 <전 미주구국향군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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