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벗이여, 이제 상하이를 떠납니다. 몇 주간의 꿈같은 여정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갑니다. 56개 민족, 13억 인구가 모여 사는 거대한 중국 대륙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지났습니다. 짧은 시간에 어찌 그들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로선 또 다른 너른 세상 한 모퉁이를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던 값진 기회였습니다.
이번 여행의 재미있는 일은 중국인에 대한 오래 된 선입견 하나를 벗게 된 것입니다. 중국인하면 만만디(慢慢地) - 느긋하고 느린 기질의 민족성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오해였습니다. 마치 미국 오기 전, 미국인들을 어리숙한 ‘고문관’으로 치부했던 것과 비슷합니다. 살아볼 수록 무섭도록 집요하고 합리적인 백인들을 오해했던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중국인들도 급했습니다. 북경 대도시나 계림 뒷골목에서나 차들은 한치라도 먼저 가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자동차뿐 아니라 자전거 떼들도 한데 엉켜 서울의 무질서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만만디와는 전혀 상반된 풍경이었습니다. 얼마 전, 중국인들이 모는 자동차의 브레이크 패드 마모율이 한국인의 경우보다 30%나 높다고 한 통계가 이제야 수긍이 갔습니다. 급브레이크나 급회전이 심하다는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절대 느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K형, 그러나 신기한 것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누구하나 멱살을 잡고 싸우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무질서 속에 질서가 도사리고 있어 차 머리를 마지막까지 서로 들이밀다가도 충돌직전 슬그머니 짬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못 본 척 비껴갔습니다. 한국인들 같이 멱살을 잡는 다혈질이 아니었습니다. 가이드 유(侑)양은 만만디가 느리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신중히 처리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급한 상황에 침착하게 처리하라는 의미이지요. 만만디가 중국인의 느린 민족성이란 것은 오해라고 볼 수 있지요.
대부분 중국인들의 기질은 우리들과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였습니다. 차부둬(差不多)로 표현되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모호한 대강주의와 보신(補身)주의. 물 마시고 이 쑤시고, 끼니가 떨어져서 쌀 사러간다는 소리 대신 쌀 팔러간다고 했던 우리네와 별 차이 없는 체면주의. 양극단을 배척하고 남과 조화를 이루려는 중용주의. 손문 선생이 중국인은 쟁반 위에 흩어놓은 모래라고 한탄했던 단결력 결여.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서양사람들처럼 면전에서 풀지 않고 나중에 혼자 열어보는 내면적 성향 등, 유교와 불교를 공유한 동양 문화의 영향과 오랜 전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눈에 띄게 한국인들과 다른 몇 가지 성향이 보였습니다.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중국인들은 한국사람들보다 내세관념이 훨씬 희박한 듯 보입니다. 이는 유교와 공산주의의 영향인 듯 한데 하늘과 지옥, 귀신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 교육, 효도, 교양 같은 현실적 이슈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종교관도 사람중심이라 말합니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육체를 초극하려는 서양종교와는 달리 이 세상에서 육체의 불로불사(不老不死)를 추구해 왔지요. 인간도 수행에 의해 초인적인 선인(仙人)이 될 수 있다는 도교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가이드 유(洧)양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습니다. 중국인들은 희박한 내세관 대신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합니다. 미엔쯔(面子), 즉 체면 지키는 것도 그 이유이지요. 그러나 체면과 현실이 상충되면 중국인들은 현실을 택합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체면이 깎여도 고개를 숙이지요
K형, 실용주의적인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함께, 중국문화의 특성을 한마디로 스펀지와 같다고 표현한 말도 참 일리가 있습니다. 외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식으로 변형해 오랜 전통의 중국 문화 속에 녹여 버립니다. 이 강한 흡수력에서 미래의 무서운 경쟁력과 잠재력을 봅니다.
상하이 공항 가는 길 곳곳에 삼성과 LG, 그리고 현대자동차의 광고판들이 현란하게 불 밝히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안 마당에서 거대한 스펀지문화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 역군들이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21세기 진정한 애국자들이란 생각에 마음속에 뜨거운 성원이 일어납니다. 상하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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