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 대법원은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법의 최종 심판자다. 연방 의회와 대통령이 아무리 법을 만들어 집행하려 해도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려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된 사람은 누구나 뜻이 맞는 대법원 판사를 자기 손으로 지명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는 원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를 새 인물로 바꾸려면 누군가가 죽거나 스스로 은퇴해야 하는데 이는 대통령의 힘밖에 있는 일이다.
이런 대법원의 속성 때문에 두고두고 골치를 앓은 사람이 프랭클린 루즈벨트다. 그가 대공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놓은 뉴딜 정책을 보수파가 주종을 이루던 연방 대법원이 수시로 무효화 시켰기 때문이다. 첫 집권 4년 간 혹시 누가 자리를 비지 않을까 학수고대했지만 전원 60대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죽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루즈벨트는 1937년 압도적인 표 차로 재선에 성공하자 제일 먼저 ‘사법 개혁’에 착수했다. 대법관이 70세가 돼도 은퇴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1명을 추가로 지명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 법안은 최고 6명까지 대법관을 늘릴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이 안이 확정될 경우 대법관 수는 9명에서 15명으로 늘어날 판이었다.
그러나 루즈벨트의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은 의회와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결국 이 안은 상원에서 부결되고 루즈벨트는 재선을 통해 얻은 정치적 자본 중 상당 부분을 까먹었다. 겉으로 보면 루즈벨트의 패배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대법원은 태도가 달라졌다. 전처럼 행정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일이 사라지고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는 ‘알아서 기는’ 법원이 된 것이다.
미 건국부터 루즈벨트 이전까지 대법원이 3권 분립의 원칙에 충실했다면 그 후 대법원은 행정부와 의회의 입장을 존중하는 쪽으로(judicial deference) 방향을 틀었다. 그 후 워런과 버거 대법원장 시대에 와서는 대법원이 단지 법을 해석하는 차원을 넘어 각종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판결을 통해 사실상 법을 제정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이런 사법부의 모습은 대법원은 헌법 제정자들의 본뜻을 헤아려 법을 해석하고 입법부와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 보수파들의 심한 반발을 샀다. 그 대표적 인물의 하나가 윌리엄 렌퀴스트였다. 그러나 1971년 대법관이 됐을 때만 해도 그는 외로웠다. 그만 유일하게 반대 목소리를 낸 채 8대 1로 내려지는 판결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레이건이 취임하고 그가 지명한 클레런스 토마스와 안토닌 스칼리아 등이 속속 입성하면서 서서히 대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주 정부 권리와 재산권 보호는 강화되고 소수계 우대와 연방 정부 권한 확대에는 제동이 걸렸다. 앤소니 케네디와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가 결정적인 순간 반대표를 던지는 경우가 있어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60년대와 70년대에 비하면 대법원 판결 성향이 현저히 보수화된 것만은 분명하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주말 타계한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아직 상원 인준도 끝나지 않은 존 로버츠(50)를 지명했다. 대법관 경력도 없는 그를 대법원의 수장으로 앉히겠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지만 그의 마음에 드는 토마스나 스칼리아를 지명했다가 심한 반발에 부딪히느니 인준이 확실시되는 로버츠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로버츠는 젊었을 때 렌퀴스트 밑에서 서기관으로 일했을 뿐 아니라 ‘렌퀴스트 혁명’으로 불리는 대법원의 보수화를 계승해나가는데도 이념적으로 적임자로 평가되고 있다. 또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어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 30년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오코너의 퇴임에 이은 렌퀴스트의 죽음으로 부시는 단시일에 2명의 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얻게 됐다. 예상대로 로버츠와 비슷한 인물이 지명된다면 앞으로 한 세대 가까이 대법원은 보수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미국 보수주의의 득세는 오래 갈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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