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소녀같은 이미지의 작가 원미랑씨.
지난 봄, 북가주 아름다운재단이 창립될 때 젊은 한인 미술가들을 위한 기금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 있었다. 서양화가 원미랑씨. 그가 기부한 작품 하나를 어떤 이가 2,000달러에 사서 이 기금의 시드머니로 적립시켰다.
아니, 미술인을 위한 기금이라니?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우아하게 붓을 들고 그림이나 그리고, 전시회 리셉션에서는 화려한 조명 아래 칵테일 잔을 들고 다니는 상류층 사람들에게 무슨 자선기금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미대생들의 화려한 치장과 씀씀이를 떠올린 기자에게 ‘원미랑’이라는 화가가 시작한 이 기금이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천지에 깔렸는데 하필 왜 미술인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의 작업실은 헌터스 포인트의 외진 바닷가, 허름한 창고같은 건물에 있었다. 예전에 군사기지로 사용하던 막사같은 건물을 시가 예술인들의 작업실로 저렴한 가격에 임대해주고 있단다.
불쑥 작업실로 들어서자 처음 본 원미랑씨는 남편 최원길씨와 함께 커다란 나무상자같은 포장을 마치려는 찰나였다. 오는 15일부터 샌디에고에서 열리는 그룹전에 보낼 작품을 UPS로 탁송하기 위해 포장중이었다고 한다.
◆숙명이 된 그림 그리기
남편이 먼저 자리를 비킨 후 점잖은 질문부터 해보았다.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아티스트는 그림을 꼭 그려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났지요. 무당이 굿을 못하면 몸이 아프다고 하는데 우리도 똑같아요. 뭐가 끼였기 때문에 하는 것이죠. 저주(curse)를 받았다고나 할까요?
그는 할 줄 아는 재주가 그림밖에 없어서 하는 것이라고 가볍게 웃었다. 그러나 잠시 그의 이력을 보니 화려했다. 경기여중과 경기여고를 나와 서울미대에 다녔다. 아마 공부하는 것이 제일 쉬울 거예요. 훨씬 안전하고요. 말이 예술가이지 목공처럼 온갖 험한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예요.
젊은 시절 그는 참 잘 나갔다.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에서 6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콧대 높은 파리 화단에서 촉망받는 젊은 화가로 72년부터 2년 동안 6번의 그룹전과 1번의 개인전에 초대받을 정도였다. 모교인 서울대에서 새파란 나이에 강사까지 맡았지만 제 발로 차고 나가면서 모진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거친 들판에 던져진 미국생활
70년대 말 건너간 뉴욕에서 그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만 그리는 순수 전업작가의 생활은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직물 디자이너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누구의 소개도 없이 작은 그림 하나를 그려 가지고 찾아가 잡(job)을 잡았지요 말단 디자이너부터 시작했지만 재능이 어디 가겠는가?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그는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아 4년 후에는 백인들을 모두 제치고 아트 디렉터의 지위에 올랐다.
난생 처음 실패해 일그러졌던 자존심을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 회복하게된 시기였지요. 그러나 그림을 못 그린 공백기였기도 하고요. 그러다 문득 ‘내가 그림 안 그리고 미쳤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어요
남편과 함께 84년 베이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그림을 안 그리면 못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린 자녀들을 키우는 바쁜 생활 속에서 틈틈이 붓을 들었고 95년에 드디어 상업용 건물 귀퉁이를 렌트해 개인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운이 좋아서 여기저기 화랑에서 제 그림을 픽업하기 시작했어요 어디 운 때문이었을까? 타고난 재능과 탄탄한 실력에 상처난 인생을 보듬고 껴안으며 쌓은 내공이 더해져 우러나온 그의 예술혼이 이제야 제대로 평가를 받게된 것이다.
인생은 거대한 신비와 끝없는 고통이 가득 찬 곳이지요. 그러나 그 다음을 보면 왜 그리도 아름다운 것일까요? 최근 그의 그림을 보면 화려한 인생 뒤에 숨은 치열한 삶이 보인다. 1일부터 팔로알토의 브라이언트 스트릿 화랑에서 개막된 그의 개인전에 전시된 그림에는 화려한 꽃밭 뒤에 숨겨진 거친 흙의 세계가 함께 느껴진다.
◆젊은 예술가들을 격려하며
그는 젊은 한인 미술가들을 보면 자신의 힘겨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국인은 예술적으로 타고난 재능과 열정이 큽니다. 예술을 하고 싶어 미대에 간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 그림 못하는 것을 보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10명이 대학을 졸업해도 살아남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한 것이 예술의 세계란다. 그가 2003년에 북가주 한인미술가협회를 결성한 것도 젊은이들을 키워주고 싶어서였다. 그 자신 아직 그림만으로 넉넉한 삶을 살 형편이 되지 않지만 젊은 사람들의 기가 꺾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밥이나 많이 사주었다고.
아름다운재단의 젊은 한인 미술가들을 위한 기금이 어떻게 발전될 것인지 그는 아직 모른다. 단지 많은 참여자들이 나오고, 이 기금이 진짜 아티스트들을 위해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뿌려진 씨앗이 더 자라면 구체적인 아이디어들이 떠오르지 않겠느냐?면서 동참자들을 호소했다.
인터뷰가 지속되면서 미술가에 대해 잘못 알았던 여러 가지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되었다. 겉에 보이는 화려함 뒤에 숨은 그들의 치열한 생활인의 모습을 어렴풋이 깨달았다고나 할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화가의 길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blessing)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어요. 화실에 혼자 있으면 자정이 가깝도록 작업에 몰두해도 전혀 다른 생각이 없어요. 오직 그림 그리는 일 자체에 무한한 행복을 느끼지요.
’미술’(美術), 그 말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일진대 원미랑씨는 바로 ‘아름다운 사람’의 모형을 살아가려 애쓰고 있었다.
<한범종 기자>
◆화가 원미랑씨 프로필
-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및 동 대학원 졸업(M.F.A)
-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 파리 6년 유학, 소르본느대 미학박사(Ph.D.)
- 서울대 및 성신여대 강사
- 파리 및 미국에서 15회 그룹전 참가
- 프랑스 및 미국에서 개인전 9회
- 현 북가주 한인미술가협회 회장
- 9월 1일부터 30일까지 팔로알토의 브라이언트 스트릿 갤러리(520 Bryant St., Palo Alto, 전화 650-321-8155)에서 개인전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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