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얘기 들었어? 토요일 뉴욕포스트 커버 스토리. 죠우가 자깅하던 여잘 해치웠대는거 아냐, 개학하던 목요일, 친구들하고, 코니 아일랜드에서, 마흔된 러시안 여자였대. 살려 달라고 비는걸, 다섯 명이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밟고, 와 그리고 죠우가 먹었대는거 있지. 경찰에 체포된 뒤, 그 애들은 그리고 웃었어. 근사하지? 남이 하지 않은 일을 했잖아. 난 죠우가 자랑스러워. 정말 멋져.”
“물건 살 사람들은 한 줄로 서고, 나머진 밖에서 나가 친구를 기다려요.”
듣다 못한 미혜가 드디어 장전된 탄환을 발사하듯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이들은 몸을 비비꼬며 킬킬거릴 뿐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느 세상에서 온 아이들이람.”
“다른 시간 속에서 온 외계인 같죠?”
선생 샌디가 끔직해서 얼굴을 찡그리는 미혜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왜들 이리 미쳐 가고 있나 그래도 자그마한 여자는 아직도 삶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는 듯 보인다. 어쩌면 난 이 동양인 이민자만도 못한 삶을 갖고 있는지도 몰라. 석사 학위 받을 때까지만 해도 이처럼 암울하진 않았는데, 교단에 서고, 보이는 것만 받아들이는 학생들과 부딪쳤을 때부터 난 부서지기 시작했지. 무엇이 날 망가뜨리고 있는 걸까.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떻게 살아야 하지. 무언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나가는 느낌에 무기력해진 그녀는 건네주는 커피 컵을 받아 꽉 움켜쥐고 서둘러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이유 모를 불안과 분노가 서늘하게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월요일 아침부터 의기소침해진 그녀 앞엔 학교로 들어가기 보단 다른 번화가로 흘러 가 버릴 것 같은 아이들과 나뒹구는 빈소다 깡통, 종이 봉지 따위가 한 뭉텅이가 되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머리 위, 줄지어 선 가로수들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오늘 그레이스가 학굘 못 가요.”
담배를 뽑아 들던 샌디는 걸음을 멈췄다. 루씨가 반갑게 웃고 서있었다.
“머리 염색하고, 피어싱해 주기로 했는데, 오늘이 예약일 이예요.”
피어싱이 고대 노예의 징표였다는 걸 알고는 있나, 미간이 살짝 접히는 유태계 여자 샌디를 보며 루씨는 어쩐지 그녀가 측은해 보인단 생각이 들었다. 히피풍의 긴 머리 탓일까. 아직도 그녀가 히피라면 하긴 딱하지, 언젯적 히피인데, 세상 변화에 그리 느려서, 원 아마 나도 미국으로 시집온 후 피나게 세상 변화에 적응 안 했던들 이미 이태리로 돌아갔거나 정신병원에 갔었겠지.
샌디와 가볍게 아침 인사를 나눈 루씨는 흑백의 학생들이 뒤섞어 꽉 찬 가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어른들의 커피와 베이글을 처리하는 미혜 옆으로 학생들 샌드위치 만드는 완다, 그 옆으로 돈을 계산하고 지폐와 동전을 긁어 정신없이 돈 통에 쳐 넣고 있는 미혜의 남편이 보였다. 그는 그 와중에도 캔디를 슬쩍하는 아이들을 귀신같이 잡아내어 내어쫓았다. 그 소동으로 앞이 막혀 미처 계산대까지 갈 수 없는 단골들은 미혜 옆에 있는 선반에 지폐를 올려놓고, 거기 준비되어 있는 잔돈으로 스스로 거스름돈을 집어갔다. 그 사이 돈들이 바닥으로 구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사간 여기에서 모든 것은 정지되고, 펄펄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직 용구 뿐, 그에 적응하듯 루씨는 미혜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려 손가락 2개를 펴 보였다. 단골들의 일상적 주문을 모조리 외우고 있는 그녀가 알아서 그레이스를 뺀 두 아이의 점심을 만들어 두 봉지에 각기 담아 줄 것이다. 차례가 되자 미혜는 루씨의 주문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그들 속에서 왁하는 소리가 터지고, 상품 진열대에 놓여 있던 팝콘 통들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이런 경운 다쳐도 우리 책임 아녜요.”
미혜는 재빨리 아이들 속으로 들어가 물건의 분실 여부를 점검했다. 목으로 땀이 흐르는 그녀 뒤에서 아이들이 콘칩 냄새를 풍기며 속삭였다.
“저 여자가 지나갈 때 널 밀었니? 네 몸에 손댔음 고소해도 돼.”
“고의로 물건 떨어뜨린 건 어쩌고?”
열을 내어 총알같이 팩 내쏘는 미혜에게 아이들은 입을 비쭉해 보였다.
“자, 그만 학교로 갑시다. 홈룸 종 울릴 시간예요, 자. 갑시다.”
교장 미스터 리빈이 문밖에서 전도사가 복음을 전도하듯 외쳤다. 그러나 팔 학년의 소문난 악당, 그래서 가게 안에 못 들어오고, 주변에서만 맴돌던 크리스 메이어가 당신은 왜 안가고, 우리더러만 가라 그러느냐 큰소리로 대꾸하자, 아이들은 환호를 울리며 더욱 가게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아동 학대 보호소에 부모를 고발하고, 학교 안에서의 문제는 경찰에게 보고되어지는 아이들은 마음으로 교육되어지지 않고 사회 시스템에 의해서만 통제되었기에 더욱 걷잡을 수 없었다.
루씨는 땀을 훔치며 아이들을 헤집고 가게를 벗어났다. 저 차이니즈들은 참 대단하다. 체구도 작고, 평소 목소리도 작은데, 저런 아이들은 휘어잡고, 그 욕쟁이 악당을 내어쫓은 여자. 조크라고 생각하며 훔치는 아이들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그녀 남편, 잘 버티며 살고 있는 중이란 생각은 혹시 오해일지 모르며 어쩌면 앞으로 미국은 저렇게 서슬 퍼렇게 버티는 차이니즈들이 주도하게 될지도 몰라. 자신의 미래가 황당하게 변할지도 모른단 불안에 루씨는 주위를 경계하며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무 것도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한 팔을 홰홰 내둘렸다. 착각하지 말자. 잘 될 거야.
그러나 그때 미혜는 창밖 학교 마당 저편에서 진저리치며 흔들리고 있는 성조기를 보고 있었다. 바람이 부나봐. 바람이 모두 이렇게 뒤집어 놓았나.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빠르게 놀리는 손과 반대로 마음은 마냥 가라앉아 갔다. 자신을 향한 낯선 눈들. 아이들 눈엔 경멸이 담겨 있다. 저들은 언제나 저렇게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걸 저들이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저들이 우리에 갇혀 있는걸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 어쨌든 어느 한쪽은 착오를 일으킨 짐승이다. 왜 이렇게 살고 있나.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내가 이루려 했던 삶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불안과 분노가 가슴을 쑤셨다. 월요일 아침부터 첫 손님과 싸운 그녀는 크림 치즈 통에 머리를 처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통과 여객에 불과했다. 시계 바늘이 삼십 분까지 내려오고, 거짓말처럼 아이들이 빠져나가자, 세 사람은 포연이 지난 뒤 다시 진지를 구축하는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완다는 재빨리 소다와 캔디를 채웠고, 미혜 남편은 빠진 물건을 가지러 지하실로 갔다.
“학교도 이젠 전쟁터야.”
그 무렵 들어와 낮은 냉장고 위에 신문을 펴놓고, 커피에 크림 치즈 베이글을 먹고 있던 패트릭이 안경을 벗으며 어질러진 바닥을 쓸고 있는 미혜에게 말을 붙였다.
“금속 탐지기로 총기 검사를 했는데도, 바로 십 분 뒤 사고가 났대네.”
비를 든 채 미혜는 목을 빼어 그 기사를 들여다보았다.
9월7일 금요일, 링컨고의 마리오 훠거슨(15)은 교내에서 급우로부터 32구경 반자동 총으로 얼굴을 맞았다. 이 사건은 개학 다음 날에 일어난 것으로, 다른 해보다 더 빨리 일어난 학교 안의 사고로 기록될 전망이다.
“열 다섯 살짜리들이...”
“열 다섯에 놀래요? 열 한 살 소년이 제 비밀을 안다고 이웃집 열 세 살 소녈 쏴 죽인 뉴스는 어쩌고”
미혜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패트릭은 피식 웃었다.
“그 애 부모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부모? 허허. 유기된 신생아로 발견된 그 애는 즉시 아동 보호소로 보내져, 그 짧은 생에를 보호소를 전전하다 결국 양부모에게 얹혀 살던 것으로 끝이었답니다. 그래 애초, 사람 같은 삶을 살수 없었던 그 애가 한일은 강도 자동차 절도 마약 밀매로 무려 여덟 번이나 처벌받은 것이었대요.” 그 순간 미혜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망미인혜천일방(望美人兮天一方)에서 딸의 이름을 취하셨다던 아버지. 하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기 위해선 천년 전 장강에서 그 시를 읊은 시인이 있어야 했고, 아버지가 계셨어야 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존재는 어느 날 우연히 거기 있게 된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의 존재는 점점 더 가벼워 가고 있다. 대체 이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문 닫고, 에어컨 틀지, 뭐해?”
미혜는 남편의 짜증에 퍼뜩 몸을 돌렸다. 코카콜라 상자를 내려놓던 그는 거기서 떨어져 재빠르게 달아나는 바퀴벌레를 발로 밟아 쓱 문지르고 있었다.
늘 뭔가에 쫓기듯 일을 재촉하는 버쩍 마른 저 친구, 패트릭은 신문을 접고 손을 흔들어 보이고 밖으로 나왔다. 이 거리에서 나고 자라, 이제 은퇴가 일년 남은 전기공인 그는 5년 전 아내가 죽은 후, 그 가게에 들러 신문 읽고 커피 마시며 세상 이야기 나누는 것을 낙으로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같은 이태리계 전 주인이 가게를 판 뒤, 재작년 새로 온 동양인 부부와는 어쩐지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아, 생활의 일부를 빼앗긴 듯 요즘 사는 게 삭막했다. 아들 폴은 가족 갖는 게 부담스럽다며, 마흔인 지금도 컴퓨터에만 빠져 있다. 어디에 마음 붙이고 살아야 하나, 그러긴 커녕 세상이 엄청 변해 정신 차리고 똑바로 섰을 수도 없을 지경이다. 잔 웨인 게이시라는 작가만 해도 그렇다. 설흔세명이나 살해하여 종신형을 받은 그는 그 사실만으로 유명해져, 그의 인터넷 카페가 생겼다질 않나. 그의 얼굴과 이름이 든 티셔츠와 머그컵들이 마이클 조단 만큼 팔린다질 않나, 감옥에서 그린 그림조차 유명해져 돈방석에 않은 그는 그 안에서 개인전용 전화로 레스토랑 음식을 주문하는 늘어진 팔자가 되었다 하질 않나, 도대체 이걸 어떤 가치관으로 용납해야 하나, 타인의 생명을 탈취하여 인생을 즐기고 있는 그는 과연 변화한 현대의 영웅인가? 그래서 변화하는 삶의 속도를 나만 따라 잡지 못하고 있는 걸까? 세상은 어디로 가고 있나? 버스 정류소로 향하던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혼란스럽다. 하늘과 땅 사이에 혼자만 남은 것 같다. 문득 밀려오는 불안, 삶의 복판에서 밀려난 느낌, 참담해진 나머지 그는 잠시 자살을 생각해 본다. 이 나이에 자살이라? 그는 헤식게 웃었다.
그러다 멈칫, 숨을 죽였다. 차도에서 피자 조각을 쪼고 있는 비둘기 떼들을 달려 온 차가 거의 덮치려 하는 순간이었다. 날아! 날아올라! 어서! 아아... 얼간이 같으니! 마지막까지 먹이를 고집하던 한 마리가 기어코 차에 깔리고 말았다. 차는 사라지고, 꿰져 나온 붉은 내장만 피자와 범벅이 되어, 검고 뜨거운 도로 위에 남았을 뿐, 그 위로 다른 차들이 계속 달려갔다. 패트릭은 분노로 숨이 차 올랐다. 평화가 탐욕을 부리다 죽는 세상이구나. 그런 그를 짙푸른 하늘이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낯선 손님 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바람이 죽었는지 나무들조차 꼼짝하지 않았다. 이러다간 제 몸무게에 깔려 죽는 생명이 나오게 될지도 몰라. 전율을 느낀 나머지 강렬하게 뜨거운 뭔가가 필요해진 그는 가게로 다시 몸을 돌렸다.
“그에겐 돼지 냄새가 나.”
“청소는 커녕 씻지도 않으니까요.”
“하느님은 뭘 하셔? 불공평해.”
건물 주인 마이크 미혜 완다는 죠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게 건물 아래 층 뒤 쪽 스튜디오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는 손수 음식을 해 본적이 없어, 늘 닛산 컵 라면 캠블 수프 피자 따위로 요기한 뒤, 길가에 내어놓은 의자에서 짧고 두꺼운 목을 늘어뜨리고 조는 것이 일과인 노인이었다. 때론 소변이 바닥으로 흘렀고, 대변이 바지 겉으로 배었어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는 옷도 빨아 입은 적이 없어, 한여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었다. 그 스웨터는 먹다 흘린 자국이 그대로 말라붙어 본래의 색깔이 무엇이었는지 구별도 되지 않았다. 헐렁한 바지는 벨트 없이 그냥 손으로 잡고 다녔는데, 물건 사고 돈 낼 때면 흘러내려 희고 퉁퉁한 다리와 쿨렁한 팬티가 몽땅 드러나곤 했다. 때론 둘러 입기도 해 자크가 등뒤에서 열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혼자인 미국 노인들이 대개 동물을 가족으로 삼는데, 그는 그런 것조차 갖고 있질 않았다. 오직 먹고, 바람과 함께 길에 앉아 졸뿐이었다. 아이들에겐 주체할 수 없고 어른들에겐 부족해서 쪼개 써야하는 시간이 그에게 오면 참으로 무용지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인분 냄새와 함께, 냉동고에서 쭈쭈바를 꺼내 그 끝을 잘라 달라고 서 있을 때면, 미혜는 혐오와 분노로 그의 깍지동만한 배를 들고 잇는 가위로 한번 찔러 보고 싶은 유혹을 받곤 했다. 그러면 거기에선 인간의 피가 아닌 다른 액체가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 그가 왜 독거 노인이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제 토요일 점심 겨워 동네 조무래기들이 자기 집안을 뒤졌다고 경찰씩이나 불렀던 그가 왜 그후 안 보이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에 그럴 수가...”
몇 명의 손님에 섞여 그때 화려한 새 옷차람에 셀폰을 목에 건 로즈마리가 각기 색깔 다른 아들딸을 안고 걸리고 시끌벅적하게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그랜드 센추럴 역에서 총 맞아 한 명이 죽고 일곱 명이 다쳤대요.”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모였다.
“긴급 TV 뉴스였어요. 러시아워에 서로 밀리다 왜 옷자락을 잡느냐 시비가 붙어, 한 남자가 상대를 쏘고, 총을 연발시켜 그리 되었대요. 도대체 세상이 어디로 가려고 그러죠?” 이 도시엔 산 목숨 죽은 목숨 구별이 없어 들어오면 늘 커피부터 찾는 패트릭이기에, 그에게 커피를 따라 넘기며 미혜가 생각하는 사이,
“다 기계 탓이오. 서슴없이 남편 아내도 바꾸고, 서로 죽이고, 차마 못 할 일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린 건, 섹스 총기 폭력을 너무 쉽게 보여주는 TV와 인터넷 탓이란 말이오. 게다 이들 기계는 이동이 쉽고 장면 전환이 빨라, 오늘날 인간에게 참고 기다린다는 것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니 기계가 인간을 개조 시켜서 그런 것이요.”
늘 근검 절약하며 자신에게조차 엄격한 마이크의 뜻밖의 말에 사람들은 흠칫 숨을 들이마셨다. 멈추어진 시간 속에 서 있는 조형물들처럼 빤히 마이크를 쳐다보았다.
상무성에서 올해 은퇴한 그는 로즈마리의 사정을 잘 몰랐던 것이다.
주급 백 불 남짓 받으며 맥도널드에서 파트 타임 하던 그녀는 일하다 만난 남자를 대낮에 집으로 끌어들인 뒤, 다섯살짜리 아들을 가게에 심부름 보내고 해서 딸을 낳았다. 그 뒤 그녀는 남편을 내보내고, 그 집 그 침대에서 그 남자와 눌러 살았다. 그녀는 같은 이태리계 이웃들의 눈총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찌 살아야 하나, 그냥 사는 거지, 뭐 스패니쉬 흑인일망정 능력 없는 백인 남편보다야 백배 나으니까, 남편 주급 이백불에 내 것을 합해도 집세는 커녕 식비조차 해결이 안돼, 정부 보조 후드 스탬프에 의지해 살며, 이십오 센트 짜리 주스 마시고, 사분의일 파운드 햄조차 살수 없었으나, 지금은 승용차로 샤핑갈 수 있고, 한 파운드의 햄도 살수 있구만, 감히 누가 나의 선택을 비난해? 특별한 부자를 제외하곤 가난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는데, 가난이 무엇인지 진짜 당신들은 알아? 아무 것도 계획할 수 없고, 가질 수 없고, 끊임없이 불안한 것, 그게 뭔지 당신들은 정말 알아? 안다면 착각이지. 그녀는 암팡지게 내뱉었다.
“백만장자 아버질 두고도 무장 강도가 되어 경찰에 사살된 청년은 그럼 TV아동이었을까요, 컴퓨터 아동이었을까요?”
그건 마이크의 단 하나밖에 없던 입양아들 얘기였다. 비번 경찰의 차를 아무 뜻 없이 건드렸다 경찰의 과잉 반응으로 사살된 뒤, 몸에서 총이 발견되었다 하여, 무장 강도가 되어버린 아들을 위해 마이크는 지금 시를 상대로 소송 중이었다. 노후가 쓸쓸하긴 자네나 나나 마찬가지일세, 어릴 적 함께 자라던 그때 육십여년 전, 우리에게 이런 빌어먹을 날이 오리라 짐작이나 했었나 하는 심정이 되어 패트릭은 굳어 버린 마이크의 등에 손을 얹었다.
“마이크, 정비소에 들어간 차를 찾으러 가야하는데, 가는 길에 좀 태워 주려나?”
바람직한 이웃의 모습을 보여주는 패트릭이 미혜는 늘 고마웠다. 시름시름 깊어 가는 가을, 도토리를 모아 겨울 양식을 저장하는 뒷마당의 다람쥐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도 패트릭 뿐이었다. “그 앤 그 희생물이었소, 만일 경찰이 좀더 시간을 갖고 침착했더라면 사실 여부를 밝힐 수 있었을 것을, 즉각 총을 사용한 것은 귀한 것도 없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도 없어진 요즘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아니겠소, 그래서 난 이 기계 문명의 변화에 가속도가 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 속에서 문명의 종말을 보게 될까봐 불안하오, 도처에 나부대는 것은 자신감과 우월감뿐이니 시지프스가 바위를 들어올려야 할 일이 없어진 세상에 파국은 예정된 순서이지 심지어, 정치와 종교 판조차도 마찬가지여서 건국 초의 합리적 이성은 사라지고, 우월감과 자신감으로 뭉친 지도자 집단이 판을 치니 난 그것도 불안하오, 우월과 공격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건데, 그런 그들을 누군가 먼저 공격하지 말란 보장이 없쟎소, 만일 그런 결과가 온다면 당신이 원하던 결과이요? 내가 원하던 결과이요? 우리 모두에게 재앙일 뿐이요. 그런 세상에 대한 불안과 분노를 말해 본 것일 뿐, 누구를 고의로 마음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소, 내 뜻 알겠소? 또 봅시다.”
사태를 분위기로 파악한 마이크는 십년 넘게 입어 말깃말깃해진 낡은 셔츠의 깃을 바로 하고 로즈마리에게 예의를 표한 뒤, 패트릭과 나가버렸다. 퇴장 당한 과거처럼 가게 안이 썰렁해졌다. “체, 혼자만 유식하네, 게다 은수저 입에 물고 태어난 인간들은 꼭 저렇게 말하지, 차라리 전쟁이나 나버려 똑같이 부서졌으면 정말 웃겨, 혼자만 겸손한 채” 로즈마리의 부자에 대한 분노가 타당성 있다고 봐야하나, 이제 그녀는 평생 그를 미워하겠지. “뻔뻔해, 열 여섯에 애 낳고, 스물 둘에 남편 갈아치우고.....” 소금 기름 따위를 사 가지고 분통을 터뜨리며 그녀가 나가고, 미혜가 중얼거리자 완다가 그 말을 냉큼 잘랐다.
“스물 다섯에 하는 결혼도 결혼이고, 열 여섯에 하는 결혼도 결혼이야”
“아이가 생겼으니까 한 결혼이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한창 몰두해야 할 나이에 무슨 할 일이 그리 없어 아이부터 낳았나 하고많은 일 중에 섹스밖에 할 일이 없었나, 미혜는 로즈마리나 완다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인생에는 어느 정도 규칙이 적용되어야 하지 않는가.
스물 일곱에 중학교 학부형이 된 완다는 점심 시간이 지나도록 퉁퉁거리며 일을 했다. 그는 저 한국여자가 싫었다.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저 여자는 영어 발음도 데데하고, 가끔 말도 막히는 주제에 삼십불짜리 티셔츠 입고 살면서 행복한 얼굴이 아니다. 주말이면 남편과 함께 영화 구경가고, 십불짜리일 망정 새 옷 사입고, 두 아들 포키몬게임 시키며 사는 나는 매일 행복한데, 사는 게 별거인양, 손님 없는 시간에 창 밖을 보고 섰을 그녀는 어디 먼 곳, 다른 시간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낯설어서 싫다.
점심 설거지가 끝나고 그녀는 담배를 핑계로 밖으로 나왔다. 경적을 울리며 사방으로 달리는 앰뷸런스들 나무위로 지나가는 더운 바람, 제기랄, 사람 신경질 나게 하네, 그녀는 바람을 혐오하며 담배를 피웠다.
저 여잔 참 다르다, 난 그게 싫어 은근히 잘난 척 하는 것도 밥맛이고, 여기서 나고 자란 내가 마크 트웨인을 모르고 톰 소여를 모른다고 그게 내 탓 이람, 더욱이 그들은 죽고 없는 사람들이라며, 지나간 시간이 무슨 상관이야, 후랭크와 만났던 열 세살, 그때 난 사는 것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어, 엄마의 여러 남자 중에서 태어난 난, 그 시절 유난 벌떡스럽게 하루 여섯 끼를 먹어대며 살만 늘어 징글징글 볶아대던 엄마에게서 가출했었고, 마약 혼숙 혼음으로 망가졌었지, 그 시절 날 구해준 건 후랭크였어, 이후 난 더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었어, 출산은 내게 살아갈 방향을 정해 주었으니까, 그러기에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살지언정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이혼하지 않은 지금의 난 행복해, 그래서 이 소중한 삶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저 여자가 싫어, 아니 저런 먹물들에게 정말 분노를 느껴, 도대체 세상을 어디로 끌고 가려는지, 왜 사는 일을 골치 아프게 만드느냐 말이야, 애들에게 술 담배 콘돔 못 판다고 맨날 남편과 싸우더니 결국 오늘 아침엔 첫 손님과 싸웠잖아. 불쌍하게도 정면 대결도 분수가 있지, 딸만 둘인 것도 불쌍하구먼 확신에 차서 자신 있게 담배연기를 내뿜는 완다 앞에서 가로수들이 옳소 옳소 머리를 끄덕였다. 그 순간 누군가 그녀를 소리쳐 불렀다. 변호사 사무실 쪽으로 꽁초가 된 담배를 던지고 돌아보니 마이크였다. 그는 죠지 방 쪽에서 뭔가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게로 뛰어들어가 미혜 남편을 불렀다. 늦은 점심을 먹고 있던 그가 쫓아가고 궁금해진 두 여자는 그쪽 벽에 귀를 기울였다. 잠시 후 비상 열쇠 꾸러미를 들고 나타난 마이크는 전화를 빌어 911에 신고하고 어디론가 더 통화를 했다.
“그레그,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죽었단 사실도 놀라운데, 아들이라?
“지금 알바니에 있다고? 그럼 어머니께 전화해 드려”
그의 시신을 시당국이나 마이크 대신 거두어 줄 가족이 있었다니, 두 사람의 놀라움과 궁금증에 부딪친 마이크는 매우 곤란해했다. 그래서 그는 아직도 일하는 죠오지의 아내는 링컨 고교장의 비서고 아들은 변호사, 딸은 계리사여서, 그들로부터 집세를 받고, 그의 생활비를 전해 주기는 해왔지만, 왜 그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는지는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돌아온 미혜 남편이 덧붙여 상황 설명을 했다.
언제였는지 모르나 그는 일어나려다 쓰러져 몸무게에 눌려 다시 못 일어난 듯 허우적거리는 모습으로 소파 밑에 쓰러져 있었으며, 당황해서였는지 시간이 지나서였는지, 대소변을 깔고 앉아 있어서, 오늘 같은 날씨에 더 고약해진 냄새로 그 방에 머물 수가 없었다고 점심 먹다 쫓아가 그 꼴을 본 그는 몹시 기분이 역겨웠다. 앰뷸런스 소방차 경찰 차가 차례로 도착하자 동네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새로운 이웃들로 해서 아무리 이웃이 무너졌다 하나, 수다와 소문을 즐기는 건 똑같아 사람들은 가게로 모여왔다. 경찰 저지선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들은 이 굉장한 뉴스가 꼭 듣고 싶었다. 그래서 새사람은 이야기를 일일이 또 하고 또 해야 했다. 죠오지에 대해 갖고 있던 분노와 적대감이 죽은 사람을 벽 하나 사이에 두고도 몰랐었다는 미안함으로 바뀐 미혜는 가끔씩 그의 방쪽에서 산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들려 오던 소리가 가슴에 자꾸 울려와 어쩐지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손님과 이야기하며 흘려 내리려는 몸을 지탱하려 남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그때 그는 슬라이스머신에 붙은 햄 부스러기의 향에 취해 덤벼드는 벌들을 죽이기 위해 힘껏 팔을 휘두르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그녀는 그 팔을 헛잡고 앞으로 넘어졌다.
“친정 아버지가 돌아갔나, 왜 이리 허둥대?”
넘어지는 순간 뭔가에 떠밀린 듯한 기분과 동시에 배반감이 느껴졌던 그녀는 남편의 야유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팩 성질을 내었다. 평소의 아내답지 않아 어처구니없어진 그녀의 남편은 그녀보다 더 화가 났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붙은 가랑잎처럼 한마디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싸웠다. 동네 사람들이 슬그머니 가 버리자 한국어를 알아들을 수 없는 완다는 전에 없던 미혜의 태도에 궁리를 굳혔다. 이 여자가 끝내주게 사람 미치게 하네, 오늘은 집에나 일찍 가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먹던 점심을 망치고 속까지 거북해져 편치 않았던 미혜의 남편은 월요일 아침부터 첫손님과 싸웠던 아내에 대한 불만까지 겹쳐 필요 이상 화를 내었다. 그는 얼굴까지 빨개져 덤비는 아내를 용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자신의 생을 확인 할 수 있는 한 방법이기라도 한 듯, 그들의 싸움은 낯선 손님으로 해서야 끊겼다. 손님은 단정한 수트를 차려입은 기품 있는 노부인이었다. 완다가 서브할 자세로 카운터에 서자 그녀는 마이크를 찾았다. 죠오지의 부인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눈치는 빨라서 이웃들이 기웃기웃 다시 모여왔다. 그리곤 그녀가 무슨 말인가 하지 않고는 안될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에겐 어떤 끈도 몸에 두르지 못하는 증상이었지요, 감옥에서 나온 후 생긴 증상이었는데, 처음 우리 가족은 그냥 참고 기다렸어요. 그는 유능한 의사였으니까요. 환경을 바꾸면 다시 일할 수 있으리란 기대로 그래서 미국에도 왔지요, 하지만 그의 증상은 더욱 악화 돼, 옷조차 입지 못하고 집안을 돌아다녀, 일은커녕 가족의 방해물이 되어갔지요. 우리는 친구도 집에 초대할 수 없었고, 이웃도 가질 수 없었어요. 결국 우리는 그만의 세계에서 그만의 시간을 갖게 하는 게 그의 행복을 돕는 길이란 생각으로 별거를 결정했답니다”
가라앉은 깊은 회색의 눈, 고통으로 떨리는 주름진 얼굴, 그 위로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노인은 잠겨드는 목소리를 애써 돋우며 얘기를 계속했다.
“아우슈비츠에선 사보타지가 일어나면 열 명의 본보기를 선발하여 교살하였죠. 그중 하나에 뽑혔던 그는 마지막 순간 구출된 것이 다행이긴 하였으나 더 이상 인간으로 복귀하지 않았어요 끈만 보아도 공포에 질리던 그는 점차 그저 존재하는 물체로 변질되어 갔으니까요. 이게 다 자신들만의 정의가 정의라고 믿은 우월감 높은 젊은이와 그의 집단이 저지른 일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이 무엇을 파괴했는지, 왜 집단적 착각에 빠져 히스테릴 일으켰는지 몰랐죠. 결코”
아아, 그는 유태인이었구나, 더욱이 그가 의사였다니, 모두들 소스라치는 심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숨을 죽이고 멈추어 선 듯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앞만 보고 달려가던 이웃들을 잠깐 붙들어 멈춰 서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요즘 전쟁이야 컴퓨터 게임 진행하듯 해서, 전쟁 박물관에나 가야 볼 줄 알았던 그 전쟁이 아직도 우리 곁에 남아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러시아계 유태인 청년 변호사 어니가 조심스럽게 침묵을 깨고 분노로 지친 노인을 부축하자 비로소 이웃들이 입을 열어 반세기 전의 그 전범을 비난하여 그간의 무안을 씻으려 했다.
“누구도 천부인이 찍힌 우월감을 가질 수 없거늘, 또한 우월감이란 바이러스는 늘 인간을 파멸시키고 마는 것을 그 머리 좋았던 사람들이 왜 몰랐었을까, 어리석고 어리석어”
“그냥 거기 있는 생명으로 그 긴 세월을 살아내게 하다니, 이건 집단 우월감이 한 개인을 어떻게 지워버릴 수 있는가에 대한 극단적인 잔혹한 일예요”
“그래도 죠오지는 적어도 우리 보단 행복했던 세대에 속했단 생각이 드네요. 잔인한 시간을 살긴 했어도, 그는 천수를 다했고, 전쟁 피해자란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산목숨 죽은목숨 구별이 안 되는 전선 없는 이런 전쟁 속에서 깨진 사금파리처럼 언제 더 깨질지 몰라 불안에 떨고있는 우리를 전쟁 피해자라고 추도해 줄 다음 세대는 없을 터이니까요. 평화로 위장된 전장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쩌면 더욱 처참할 수도 있죠.”
물 한 병 집고 일불 건네며 돌아서는 손님의 등을 보며 미혜는 아버지를 다시 생각했다. 서울에 다니러 온 사이 전쟁이 일어나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빈 나무 둥지처럼 사시다 돌아가신 아버지, 그 분의 상실감으로 해서 우리 가족은 굴절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리고 평생 그리움으로 먼 곳을 바라 보셨던 아버지의 비극은 힘 가진 자의 우월감으로 재단된 땅 위에서 살며 대리 전쟁을 치렀기에 겪었던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우월감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극렬한 상태가 전쟁이며, 우리는 우월감이 피가 되어 강처럼 흐르는 물결 속에 너도나도 떠밀려 가고 있는 중이구나.
“참, 마구잡이로, 어느 날 갑자기, 목숨이 사라지는 세상이오, 게다 이나마 숨쉬고 살던 평화도 그만, 어느 한 사람의 판단 착오로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전장으로 내몰릴지도 몰라 더욱 불안하고 두렵소, 또한 그들은 정보 시스템으로 국가는 관리될지언정 국민조차 관리할 순 없지, 아니요?”
철물점에 갔던 마이크가 어느 새 들어와 미혜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아내가 생퉁스러웠다. 냉철했던 그녀는 어디로 가고, 왜 점점 냉소적인 감상주의자가 되어 가는가.
오늘날 사회는 패자에겐 더욱 아량이 없는 방향으로 가고있다. 상황 적응에 일패도지한 죠오지가 그 증거이다. 그는 삶의 활로를 열지 못하고 무릎 꿇은 패배자일 뿐이다.
생명은 비록 들판의 한 송이 풀꽃일지라도 저마다 악착한 환경을 극복하고 승자가 되어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그런 잔인한 현실에 맞서 그는 어찌 살아야 했나, 이 점을 말했어야 아내다웠다. 한데 웬 신세타령이람, 그러나 그는 입 열어 말하진 않았다. 묵묵히 주문 받은 빈 파운드의 볼로냐를 썰었다. 전직 학원강사였던 그는 여기 온 후, 지난 십여 년간 자신과 관계되지 않는 한 어떤 경우고 말 보태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다.
곧 학교의 하교시간이 되었다. 인간에서 깨진 물건이 된지 오십여년만에 대소변을 깔고 앉은 채, 자신의 무게에 눌려 비로소 생명의 불이 꺼진 죠오지를 실은 앰뷸런스는 금방 아이들로 둘러 싸여 구경거리가 되었다. 놀란 경찰들이 저지선 방어를 위해 호루라기를 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시간, 산다는 건 지루해. 제기랄, 대체 산다는 게 뭐야? 엄마 아버지 선생 순경 나으리나 쏴버릴까?”
랩송을 웅얼거리며 차안을 기웃거리던 아이들은 차에 치어 배가 터진 비둘기를 밟고, 개똥을 묻혀, 가게 안으로 쳐들어갔다.
“서로 존중, 잊지 말고, 자, 한 줄로 서요”
“줄 안 서면 서브 안해요.”
무엇이든 가능한 그들의 광기에 이웃들이 밀려났다. 잠깐 한숨 돌리고 있던, 죠오지를 실은 앰뷸런스의 운전사는 인파에 놀라 차를 출발 시켰다.
차는 경적을 내지르며 곧 모퉁이를 돌아갔다.
붉은 비늘을 털며 소방차가 그 뒤를 따랐다. 미처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이웃들은 입을 벌리고 멍청하게 서서 사라져 가는 한 시대의 마감을 바라보았다. 타인의 착각과 오류에 의해 부서졌던 그는 끝내 이렇게 가는구나, 분노도 잠깐, 그리고 그들은 곧 흩어졌다. 죠오지의 방을 둘러 본 그의 부인과 마이크도 곧 경찰과 함께 앰뷸런스의 뒤를 따라갔다. 학교가 끝난 빈 거리에 남겨진 나무들만이 두 팔 벌리고, 이제 모든 것은 잊으세요, 다 끝났잖아요, 내일은 결코 알 수 없고요, 망각의 미혼약을 뿌리듯 설렁거리고 섰을 뿐이었다. 북새가 끝난 뒤, 오늘은 일찍 퇴근하겠다는 완다를 보내고, 비로소 미혜는 남편이 슬그머니 없어진 걸 알았다. 또 하나의 낯선 하루가 기울고 있는 지금, 이제부터야 바쁠 일은 없겠지만, 점점 더 옹졸해져 가는 남편에 대해 그녀는 누군가와 싸우고 싶을 만큼 짜증이 났다. 노여웠다. 서글퍼 허수해진 그녀는 우유 상자를 당겨 그 위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패트릭의 차가 지나간 텅빈 거리에, 시간이 흘러 고여 넘치며, 큰 액자 같은 창밖으로 눈부신 태양 아래 서로 손 내밀어 부드럽게 위무하고 섰을 가로수의 나뭇잎들이 보였다.
평화로웠다. 그러나 생소한 평화였다. 무슨 평화가 여기에 있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 평화인가. 나뭇잎은 의도하지 않아도 바람에 의해 흔들려야 한다. 바람은 공기의 이동에 의해 의도하지 않아도 움직여야 한다. 공기는 냉온의 기온에 의해 의도하지 않아도 움직여야 한다.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 흔들리고 싶지 않은 나무와 흔들어야만 하는 바람과의 전쟁을 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한데 그것이 눈에 평화로 보인다면 이것은 고정 관념 탓이다. 고정 관념이란 착각.., 거기서 그녀의 생각은 끊겼다.
문이 열리고, 턱을 괴고 있던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침의 그 푸른 머리 청년이 날카로운 턱선을 세우고 거기 서 있었다. 아버지와 어긋난 오빠가 자살했던 그 어려운 나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은 성난 얼굴이었다.
“종일 재수가 옴붙었어. 이지와이러 팔지 않는 너 때문이었어.”
그는 오늘 차단 당한 자신의 욕망 대신 응징할 대상이 필요했다. 집 떠난 지 오랜 흑인 모하메드, 그는 멀어져 가는 여자 친구의 관심을 끌고 싶어 머리를 푸르게 물들이고, 일요일 늦은 밤 그녀에게 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대했던 섹스를 거절했다. 관계 회복을 쉽게 생각했던 그는 쉽게 좌절을 느꼈다. 세상에 끈이 없음을 원망했다. 내 집은 이 세상 어디에 있는가. 고달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좌절은 분노로 절망으로 변해, 오늘 아침, 환각으로나마 위로가 필요했다. 그러나 생퉁맞은 저 여자로 해서 과속 단속 경찰에게 쫓겨 롱아일랜드까지 가서 월요일 마저 망치고, 이제 겨우 여기에 돌아올 수 있었다. 나를 새로 만든 저 여자,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우린 그런 거 취급 안 한다고 한 것, 그게 뭐 잘못되었어? 마약 문 연 가게에 들어와, 그것도 어미나잇살인 사람에게 월요일 신 새벽부터 댓바람에 욕한 건 괜찮고? 넌 부모도 없니? 외계인이야?” 네가 소셜 워커냐? 내 유랑과 고통과 절망을 네가 알기나 해? 돈만 셀 줄 아는 차이니스 주제에. “씨팔, 그건 너지. 그래, 아까 말했잖아. 너 같은 노란 바퀴벌레들 이 땅에서 싹 밟아 쓸어낸다고.” “도대체 그 터무니없는 발상은 어디서 온 거니? 우월감이야, 피해 의식이야? 네가 남을 존중하지 않는 한 아무도 널 존중하지 않아. 내가 노란 바퀴벌레면 넌 검은 지렁이인걸, 어디다 대고 감히!”
띨띨한 초병처럼 낯선 손님에게 대하는 안전 수칙도 잊은 채, 분노를 토하는 여자를 항해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증오를 폭발 시켰다. 피아 간의 파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미친 듯한 충돌은 산산이 흩어져 죽음의 재가되어 내렸다.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할 겨를은 더욱 없었다.
총을 본 순간, 본능으로 비켜서던 미혜는 왼팔을 움켜쥐고 주저앉았다. 청년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상처가 화끈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액체가 느껴졌다. 액체는 곧 붉게 넘쳐 흘렸고, 사위는 가라앉아 수조 속처럼 고요했다. 그 낯선 고요는 지혈을 위해 되도록 심장을 낮추고 상처 부위를 치켜올린 채 바닥으로 누운 그녀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래서 그녀는 우주로 지나가는 바람소리조차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 바람! 천 년전 장강에서 불던 바람은 지금도 저 우주에서 불고 있을까. 그 우주의 주인은 누굴까, 너 바람인가, 아니, 우주의 주인은 결국 흐르는 시간이었네. 강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그 강가에 나와 소요하는 사람들, 그 물살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며 떠밀려 가는 사람들을 그 순간 그녀는 보았다.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고, 결국 시간이 주인이었구나. 삶을 주재하고 완성해 주는 시간, 신의 정체는 시간이었어. 맞서 싸웠던 삶의 정체가 무엇이었던가 이제야 눈이 떠지는 느낌에 마음이 가라앉으며 차츰 분노가 사그라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신이 흐려왔다. 순간 그녀는 당황해졌다. 이게 아닌데, 이렇게 가기 위해 그토록 숨가쁘게 산 건 아닌데, 이를 어째, 무엇이 착각이었던가를 확실히 비로소 깨달은 그녀는 두려운 나머지 집착을 잃고 팔을 내저었다. 시퍼런 낭떠러지에 맞닥트린 느낌이었다. 아아, 그이는 지금 어디쯤 오고 있을까. 그녀는 남편과 두 딸의 가물거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떴다.
땀투성이가 된 동네 꼬마들이 가게로 뛰어 들어왔다. 몬스터같은 차이니스들이 다 어디로 갔지 빈 가게는 곧 놀이터가 되었다. 루씨네 막내 마리아는 궁금한 나머지 발돋움해 카운터 뒤를 보았다. “미래!” 발음이 어려워 마리아는 늘 그렇게 그녀를 불렀다.”거기서 자?” 놀라서 카운터 뒤로 돌아간 마리아는 흥건한 피에 멈칫했다. 내가 가지고 놀다 버린 지아이 제인처럼 미래가 누워 있잖아. 죽었을까. 악의 무리와 싸우고 또 싸우다 쓰러진 제인처럼 불쌍한 미래, 죽으면 안돼. “여기서 자면 안돼. 일어나!” 미혜가 가늘게 눈을 떴을 때, 어린 것은 근심스럽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리아의 푸른 눈이 기척 없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어린 것의 흰옷 자락을 가능한 한 잔뜩 움켜잡았다. “마리아, 제발.. 911에 전화해. 할 수 있지?”
이순혜
▲1947년 서울 출생
▲서울에서 13년간 공립 중학교 교사 생활,
▲뉴욕에서 15년간 델리 그로서리 운영.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