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웨스트버지니아에 다녀왔다. 워싱턴 근교에 사는 경기고등학교 53회 동창생 열 명이 그곳 프린스톤에서 소아과 의사로 있는 고영희의 초대를 받아 그리한 것이다. 나야 고등학교 1학년만 다니고 1년 휴학했다가 54회 아이들하고 같이 다니기가 창피하다는 생각에서 검정시험으로 대학엘 진학했기 때문에 53회 동창 자격도 없지만 관대한 친구들이 너그럽게 보아주어 이곳으로 이사온 다음해인 1979년부터 두 달에 한번 꼴로 동창 모임에 참석해왔다. 이 근방에는 나 말고도 가나다순으로 해서 고무환, 이규식, 이병붕, 이선택, 이종두, 정용덕, 최영락, 최충, 최한득, 그리고 함승호가 살고 있다. 금년에는 자격도 없는 내가 회장으로서 8월달 정기모임을 고영희 동네에서 갖기 위해 그와의 연락, 가는 사람들의 명단파악, 모텔 주선 등 문자 그대로 수십 차례 전화연락과 이메일 교환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학회 사정으로 이병붕만 빠졌고 워싱턴에 장기 출장중인 김현길도 못 왔다.
300마일 여정이라서 될 수 있으면 SUV를 가진 친구들 차에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이 동승하도록 마련했다. 우리는 고무환이네와 같이 갔는데 금요일 아침에 그의 집에서 만나 떠나면서 초등학교 시절 원족이나 소풍 가는 기분처럼 들떠 있었다. 66번울 서쪽으로 가다가 81번을 만나 남행 하다보면 460을 만나 서쪽으로 오면 길이 꼬불꼬불 험난하다는 게 고영희의 안내문이었다. 길이 꼬불꼬불은 하지만 미국 상원의원 중 최고참인 로버트 버드 옹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인지 버지니아를 벗어나 웨스트버지니아로 진입하면서부터 도로포장상태가 더 좋다는 인상이었다. 예전에 들은 풍월을 잘못 기억해서 길이 ‘양장구절’ 같다고 했다가 그 의미를 놓고 설왕설래한 다음 몇 시간 후에야 ‘구절양장’이라야 맞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고백하자 내 아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사람의 실력은 그 모양 그 꼴이라고 해서 여러 차례 박장대소가 벌어졌다.
해발 3,500피트 정도의 고원에 자리잡고 있는 프린스톤 부근에는 ‘스템파이프’(Stempipe)란 주립공원이 있는데 고영희는 금요일 6시까지 온 사람들을 위해 그곳 산장의 식당에서 맛있는 저녁을 대접해주었다. 그 다음날 골프를 치는 사람들은 바로 그 공원에 있는 골프장으로 향하고 골프를 못치는 패들은 고영희 안내로 같은 공원 내에 있는 케이블카를 타고 강 계곡으로 내려가 산책을 하는 등 웨스트버지니아의 절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고무환 부부는 산을 좋아하는 패와 동행했기 때문에 우리 둘은 고영희 차에 동승했었다. 예정인 즉 고영희 집에서 2시경 만나 비빔밥을 먹고 쉬다가 몇 십 마일 떨어진 월 파르트 하우스라는 디너극장에서 Crazy for You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관람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호텔 로비에서 1시 40분에 만나자고 약속되어 우리 부부가 정각에 내려갔더니 아무도 없어 한참 기다리다가 고영희 집에 전화를 한 결과 우리를 잊고 갔다는 것이다. 이종두가 자원해서 우리를 데리러 오는 동안 아내가 좀 쫑알거렸지만 나는 그날 아침에 온 친구들의 차 배정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잊고 간 것일 터이니까 이럴 때일수록 ‘대인의 금도’를 보여야 한다고 달래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상 고영희 집에 도착하자 친구들이 나오면서 회장님을 두고 왔으니 석고대죄해야 된다는 등의 농담을 하자 기분이 상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고 어째서 그럴 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따져댔으니 대인의 금도는 커녕 소인배의 옹졸함과 수양부족을 그대로 드러내는 큰 과실을 범하게 되었다.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어찌나 좌중을 불편하게 했던지 고영희 부인이 잘 준비한 맛있는 비빔밥에 계란 부친 것을 넣는 것조차 잊어버렸다는 것이니 내 잘못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특히 평소부터 가까웠던 이규식에게 “네가 어찌 그럴 법이 있느냐”고 대갈일성을 했으니 후회막급일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들어가면서 “내가 너무 작은 사람이라 빠졌어도 아무도 몰랐었기 때문에 그리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여유를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성경을 몇 십 년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으려고 노력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은 참담한 심경이었다. 사람이 중병에 걸리던지 또는 죽을 때가 가까우면 성격이 변한다니까 내가 환장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와 자괴심 마저 든다. 동창생들 특히 동창의 부인들에게 깊이 사과하는 바이다.
<남선우 변호사 MD, VA 301-622-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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