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벗이여, 남경에 도착했습니다. 양자강 이남의 요충지로 주원장이 세운 명(明)나라를 위시해 9개 역대 왕조의 도읍지입니다. 그러나 근대의 남경은 손문의 묘, 중산능(中山陵)으로 인해 손문 선생의 후광이 빛나는 싱그러운 숲의 도시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손문(孫文)은 중국 혁명의 아버지입니다. 부패한 청나라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워 민권혁명을 이룬 분입니다. 또한 서구 열강으로부터 민족해방을 주창했지요. 그리고 민생을 위해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를 시도합니다. 민권, 민족, 민생 - 삼민(三民)주의를 이끈 근대 중국의 국부(國父)입니다.
K형, 중산능은 자금산 제 2봉 남쪽 거대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능 입구에 해당하는 패방(牌坊)에서 묘실까지 392개의 계단으로 되어있는데 올려다보니 아득합니다. 당시 인구 3억 9,200만 모든 인민이 주는 존경을 상징했다지요. 푸른 기와를 올린 중간 능문에는 손문 선생이 친히 쓴 천하위공(天下爲公) 이란 현판이 붙어있었습니다. 천하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이라. 즉 권력은 국민의 것이라는 민권주의의 표방입니다.
묘실까지 올라가는 계단 옆에는 히말라야 소나무가 청청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정점인 묘실에는 흰 대리석을 깎은 손문의 전신상이 누어있고, 그 아래 유해를 모셨다고 합니다. 31세에 중산능을 설계한 여염직 - 그는 잠자는 중국인민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능을 종(鐘)모양으로 설계했다는 애국심과 독창성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천재는 능 공사에 심혈을 쏟다가 병을 얻어 요절했다지요.
벗이여, 손문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아내이자 혁명동지였던 송경령의 자취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녀도 손문 선생 못지 않은 국민적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중국 근대 여성운동의 선구자로, 사회운동가로 후년 명예 주석에까지 오른 추앙 받는 지도자였지요.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그녀의 배경은 혁명가의 집안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상해 부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인 송가수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미국 유학을 한 득세가의 집안이었지요. 그녀의 언니는 재벌과 결합한 송애령, 동생은 장개석의 아내가 된 송미령으로 그들의 극적인 일생은 영화 송가황조 (宋家皇朝)에서 잘 묘사되었습니다. 형도 그 영화의 첫 자막을 기억하신다고 하셨지요?. 송애령은 돈을 사랑했고, 송미령은 권력을, 그리고 송경령은 조국을 사랑했노라했던 대사 말입니다.
송경령은 미국 위슬리대학을 졸업한 후 손문의 비서로 그의 혁명노선을 추종합니다. 그 후 22살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손문과 전격 결혼, 그의 반려로 정치투쟁에 뛰어들지요. 특히 손문의 사상을 집약한 방대한 저술 및 번역 사업과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과의 친교를 도운 일은 그녀의 역사적 공헌이었습니다. 이는 실력과 재능, 그리고 헌신을 겸비한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거의 불가능했던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가장 큰 내조는 손문 휘하의 군벌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남편을 도피시킨 일이겠지요.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녀는 남편의 탈출을 설득하고 홀로 남습니다. 중국에 나는 없어도 되지만 당신은 없으면 안됩니다 그 때 보인 단호하고 희생적인 행동은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깊이 신뢰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훗날 손문의 유업을 이어가는데 큰 발판이 되지요.
벗이여, 손문 선생의 위상을 보면서 우리 조국의 김구와 안창호 선생에게 송구하고 미안한 생각이 자꾸 납니다. 모택동과 장개석 정권 모두에게 추앙 받는 국부로 우뚝 서 계신 손문 선생이 부러웠습니다. 우리에게도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을 초월해서 세세토록 존경받을 수 있는 이 어른들이 계신데 묘비하나 변변히 간수 해 드리지 못하는 우리 후세들의 못남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국민적 영웅을 세우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우리의 역사. 석양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중산능을 내려오며 가슴 한가운데로 횡 하니 지나가는 서글픈 바람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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