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26회 문예공모전 생활수기 가작-눈물의 고백
동양의 부부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가 의지하고
위로해주는 영적인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동양의 가족제도가
미국 아니 서양의
가족제도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본다
나래야. 아빠는 사회사업학을 공부하기 위해 1997년 가을에 미국 U대학에 입학하여 1999년에 졸업하였다. 그때 너는 일곱 살로 엘리멘터리 스쿨 2학년이었는데 올 가을에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구나. 지금도 너에게 미안한 것은 내가 공부하느라 너와 놀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때 아빠에겐 힘들었던 공부보다도 너에게 차마 말 할 수 없었던 고통들이 많았다. 8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에 와서 너에게 고백하는 이유는 네가 앞으로 성장하여 미국에 소수민족으로 살면서 정체성을 잊지 말고 떳떳이 살아갈 것을 바라는 의미에서이다.
8월말에 시작한 첫 학기는 설레었지만 재미있었다. 그 첫 학기에 들었던 과목의 이름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지만 실습까지 합하여 네 과목을 수강했었다. 그 중에 가족생활에 관한 것으로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자녀들과의 갈등을 현명하게 극복하느냐를 연구하는 과목이 있었다. 강사는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갓 부임한 J교수였다.
수업이 진행되면서 서양의 가족제도와 동양의 가족제도를 비교하여 서로의 장점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동양의 가족제도를 연구하는 시간에는 장점을 배우기보다는 미국의 가족제도의 우월성을 내세우면서 동양의 남자들은 아내의 순종을 강요하고 자녀들에게 독재자처럼 군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비판을 들으며 나의 머리 속에는 계속해서 하나의 질문이 맴돌았다.
나는 수업 내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물었다.
“미국의 가족제도가 그렇게 이상적이라면 왜 이혼율이 높고 왜 문제 아이들이 많으냐? 동양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은 강요보다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미덕이라고 믿는 오랜 전통 때문이다.”
나는 조리 있게 말하기 위해 강한 영어 액센트로 차라리 웅변을 했었다. 그리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데 J교수의 반응이 곧 나왔다.
“후진국에서 여자들이 순종해서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혼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고 만일 부부 관계가 평등하지 못하다면 이혼이 바람직한 것이다.”
결혼과 경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나에게 가장 추한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결혼은 그 어떤 것도 초월해야 된다고 믿고 있던 나는 즉시 다시 손을 들고 반박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결혼이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남자와 여자가 같이 사는 비즈니스라는 얘기냐? 결혼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신이 허락한 신성한 영과 육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에서 경제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우선시켜서는 안 된다고 본다. 사람의 행복은 물질적인 충족보다는 영적인 충만함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예로 선진국의 자살율이 후진국보다 더 높지 않으냐? 동양의 부부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가 의지하고 위로해주는 영적인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동양의 가족제도가 미국 아니 서양의 가족제도 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본다.”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으로 가는 데 나이지리아에서 유학 온 학생이 동양의 가족제도가 자기 나라의 가족제도와 비슷하다며 악수를 청해왔다. 그는 학부 때부터 미국에 유학 와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미국인의 성격을 잘 아는 그는 수업 시간에 의견을 발표하되 미국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그의 말이 맞았는지 J교수는 다음주에 제출한 페이퍼에 C를 주고 말았다. 이유는 영어 문법도 틀리고 내용도 충실치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보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번째 리포트는 미국인 학생에게 사전을 검열을 받아 영어도 정확하게 하고 내용도 더 충실하게 하여 제출하였다. 그러나 역시 C였다. 보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유를 알고 싶었다. 연락이 되지 않아 결국 그의 사무실 앞에서 2시간을 기다린 끝에 그를 만났다.
“내가 미국의 가족제도를 비판하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의견을 얘기한 것뿐이다.”
J 교수는 예상외로 친절하였다.
“너도 엄연히 이 학교 학생이니 수업 시간에 의견을 발표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오늘 나를 찾아온 용건이 무어냐?”
“왜 내가 제출한 페이퍼에 C를 계속 주었는지 묻고 싶어서 이다.”
“그것은 내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바쁘니까 그만 가봐라.”
내가 도대체 내용이 어디가 안 좋다는 것이냐 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일어나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결국 나는 그 과목에 C를 받고 첫 학기를 마쳐야 했다.
새해가 되어 두 번째 학기가 시작되자 나는 지난 학기의 우울했던 일을 잊고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 그곳에서 만난 나이지리아 학생이 나에게 들려준 얘기는 나를 다시 한번 당황하게 만들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학과장인 P교수가 모든 외국인 학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데 나보고 왜 안 왔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초대장을 받지 않았었다. 그날 나이지리아 학생은 P교수가 나에 대해 이러저러한 것들을 물어 보더라며 조심하라는 귀뜸을 해주었다.
그 뒤 이따금씩 J교수와 P교수를 교정에서 만났지만 인사도 받지 않았다. 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면서 밤잠을 설치다 보니 아침에는 피곤했다. 그러다 보니 혈압이 상승하여 어느 날은 천장이 내려앉는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었다. 다행히 아무 일은 없었다. 그러나 U대학에 와서 이상하게 일을 꼬이는 것 같아 사회사업 공부를 시작한 것이 후회되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떠나면 모든 것이 평온을 되찾을 것 같아 떠나기로 했다가 다시 마음을 바꾸었다. 한번 세운 뜻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고마움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당시 우리가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교인들이 매일 찾아와 기도해주었던 것이다.
두 번째 학기가 끝나고 3개월간의 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방학 동안 나는 주말에는 수업을 듣고 주중에는 학교 건물을 관리하는 메인티넌스로 일하게 되었다. 임금은 많지 않았지만 아파트 비는 충분히 낼 수 있었다. 그러나 20여명 중에 19명은 흑인이었으며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메인티넌스는 막노동 일이었다. 기숙사 안에 있는 낡은 철제 침대를 새 침대로 바꾸는 작업은 힘이 세야 했다. 그러다 보니 체구가 작은 나하고 같은 조를 이루어 일하는 덩치가 큰 흑인 학생 오닐이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나는 그와 같이 기숙사 1층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방학이라 에어컨을 전부 꺼 놓았기 때문에 땀이 비오듯했다. 그는 내가 끙끙대며 무거운 침대를 옮기는 것이 재미있는 지 이따금씩 손을 놓고 웃었다. 그러다가 워키토키를 통해 수퍼바이저에게서 무엇인가 지시를 받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Take five!”라고 외치더니 나가 버렸다.
Take five라는 영어 표현은 나에겐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다른 미국인 학생이 있으면 물어 보겠지만 방학이라 썰물처럼 학생들이 빠져나간 텅 빈 기숙사에는 나 혼자 뿐이 없었다. 그는 나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간 것이 분명했다. Take five라는 말을 무엇인가 다섯 개를 가지라는 것인데 무엇을 가지라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그가 돌아오면 자기 영어를 못 알아들었다고 불평할 것이 뻔했다. 한참 궁리하다 마침내 뜻을 알아 차렸다. 그것은 기숙사 5층으로 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수퍼바이저가 5층에 해야할 일이 있으니 그쪽으로 이동하라고 했던 것이 분명했다.
5층에 올라가 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닐의 이름을 방마다 돌아다니며 크게 불렀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10분 가량을 보내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니 그는 거기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고함부터 쳤다.
“너 어디 있었느냐?”
“네가 take five라고 해서 5층에 갔다 왔다.”
“Oh. My God.”
곧 그는 구석으로 가더니 수퍼바이저와 워키토키로 통화를 시작했다. 비록 정확하게 들을 수 없었지만 나를 욕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영어를 미국인처럼 유창하게 못하였지만 미국인들이 자주 쓰는 영어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계속되는 나에 대한 욕설을 듣고 있을 수 없어 그에게 고함을 쳤다.
“야. 너 나한테 계속해서 욕하고 있는 데 이제 그만 해라.”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왜 미국에서 공부하느냐? 네 나라로 돌아가라.”
나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비록 돈이 없어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지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러는 너는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왜 미국에서 노예처럼 사느냐?”
“뭐라고?”
순간 그는 욕설을 쏟아 부으며 바닥에 떨어진 판자 조각을 집어던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을 집어 던졌다. 그러나 화분은 그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가 이번엔 화분에서 쏟아진 흙을 집어 나에게 뿌리자 나는 그가 던진 판자 조각을 주어 던졌다. 서로의 고함이 오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져 갔다.
그때 백인 수퍼바이저가 들어왔다. 나는 즉시 멈추었지만 오닐의 나에 대한 욕설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수퍼바이저가 그만두라고 고함을 치자 그는 멈추었다. 화가 난 슈퍼바이저는 나에게 큰소리로 물었다.
“너는 도대체 어디 갔었느냐?”
“저 녀석이 Take five라고 하기에 5층에 갔었다.”
순간 슈퍼바이저의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말은 5층에 갔다오라는 것이 아니고 5분 동안 휴식을 취하라는 말이다.”
내가 영어를 잘못 이해했던 것이었다. 즉시 내가 오닐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일을 못하겠다며 워키토키를 바닥에 팽개치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출근하니 메인티넌스를 총 관리하는 디렉터가 그의 사무실에 나를 보고 싶어하였다. 그의 몸집은 나의 두배는 되었다.
“나 역시 외국에서 군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언어의 어려움을 잘 이해한다. 그러나 같이 일하는 동료와 싸워서야 되겠느냐? 너 혹시 어제 싸울 때 오닐에게 화분을 던졌었느냐?”
이미 그는 다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랬다. 그가 먼저 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판자를 던지기에 나도 엉겁결에 창가에 놓여 있는 화분을 던졌다.”
“오닐이 네가 던진 화분에 때문에 팔을 다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비록 화분을 던졌지만 거리가 멀어 그를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너 지금 당장 오닐에게 사과해라.”
“무슨 소리냐? 싸움을 먼저 걸어 온 사람은 오닐이다. 그런데 나보고 먼저 사과하라니 지금 너 같은 흑인이라고 편드는 것이냐? 이것은 인종차별이다.”
“말조심해라. 네가 오닐에게 화분을 던져 다치게 한 것은 엄연한 폭력이다. 그런데도 네가 잘못이 없다는 것이냐?”
문득 속에서 뜨거운 용암같은 것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오닐이 나에게 먼저 판자를 던진 것은 괜찮다는 것이냐? 너 같이 인종 차별하는 사람하고는 더 이상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는 그의 사무실을 나와 버렸다.
당시 학교에서 조교를 안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번 지도교수가 정해지면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며칠 뒤 내 지도교수로 있던 K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를 더 이상 자기 조교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학교에서 일하면서 흑인 학생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
만나서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 참았다. 그때 나는 참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알았다. 더욱이 내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상황에서 참아야 한다는 것은 억울했지만 참고 참았다. 이제 조교를 계속하려면 다른 교수를 찾아야 하는 데 학과장인 P교수가 사주를 해서 그런지 교수들 모두가 거절했다. 살아오면서 그때처럼 답답하고 힘든 때가 없었다. 말 그대로 상자에 갇혀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발버둥치는 새와 같은 신세였다.
나이지리아 학생은 나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고 위로를 많이 해주었다. 그리고 여자 교수가 한 명 새로 왔으니 찾아가 사정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바로 약속 시간을 정하고 만났다.
“너 어느 나라 출신이냐?”
“한국에서 왔다.”
“오! 한국?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가장 친한 여자 친구가 한국 학생이었다. 김치? 처음엔 메워서 못 먹었는데 나중엔 나도 잘 먹었다. 그런데 김치도 종류가 많더라. 맛도 서로 다르고. 좋다. 너를 기꺼이 나의 조교로 임명하겠다.”
그 여자 교수는 비록 미국인이었지만 동양여자처럼 키가 작고 말수가 적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3학기 째가 시작되었다. 3학기 때는 당시 박사과정에 있는 미국 여학생 마가렛이 그룹상담이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여학생은 첫 수업부터 칠판 앞에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 완전히 말로만 수업을 하였다. 미국인 학생들은 그 여자가 말하는 것을 잘 따라 받아썼지만 나는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이해하려고 신경을 쓰다보니 받아쓰는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니 강의 내용의 반만 적어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서 작성하는 두 개의 리포트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은 마가렛은 학생들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지금까지 강의한 내용을 펴놓고 시험 보는 소위 오픈 북 테스트를 하도록 해주었다. 학생들 모두가 기뻐하였다. 그러나 강의 내용의 반뿐이 따라 적지 못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인 학생의 노트를 빌려 복사하였다.
오픈 북 테스트는 암기할 것도 없고 특별히 공부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복사했던 미국인 학생의 노트는 강의 내용을 꼼꼼히 적혀 있어서 콧노래를 부르는 마음으로 가볍게 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나 마가렛이 갑자기 다가와 내가 보고 있는 노트를 빼았었다.
“이것 다른 사람 노트 복사한 것 아니냐? 이것은 치팅이다.”
치팅? 내 일생에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하면서 바로 반박을 하였다.
“오픈 북 테스트에서 다른 학생의 노트를 복사한 것이 왜 치팅이냐?”
순간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활처럼 나에게 날라 왔다.
“다른 학생 시험 보는 데 방해하지 말고 빨리 나가라!”
마가렛은 나의 시험지를 몰수하더니 나를 밖으로 쫓아내었다.
결국 두 개의 리포트에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에 관계없이 마가렛은 최종 점수로 나에게 C를 주었다. 정말 억울했다. 몇몇 친한 미국 학생들은 학교 당국에 찾아가 항의하라고 하고 혹은 변호사를 선임하여 고소하라고 까지 했다. 결국 용기를 내어 학점을 관리하는 아카데미 오피스의 디렉터를 만나 사건의 전부를 얘기했다. 그러자 그는 내 문제는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당사자를 만나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었지만 조언이라도 구하고자 학교 주변에 있는 미국인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 변호사는 먼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미국에서 공부하는 나에게 동정을 표하였다. 그러나 시험은 주관적이라 어느 쪽이 옳다고 판단하기 어려우며 설사 고소를 하더라도 몇 년은 걸리니 차라리 포기하고 다음 학기에 열심히 하여 점수를 만회하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이미 C가 두 개를 받은 나는 한 개만 더 받으면 졸업을 못하기 때문에 초조의 연속이었다. 밤잠을 자지 않고 수업 준비를 하고 최선을 다해 수업에 참여를 하였다. 인간이 나약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되듯 나는 매일 이번 학기만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었다. 마지막 학기에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공부하는 과목을 수강했었다. 나는 한국문화와 미국문화의 차이를 발표를 할 때는 일부러 한복을 입고 가서 발표하였다.
“한국 문화는 내가 입은 이 한복 바지처럼 수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도 들어 갈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반면, 미국 문화는 양복바지처럼 수치를 정확히 재어 만들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갈 여유가 없는 것 같다.”
학생들의 박수가 터져 나오고 미국인 교수는 나에게 악수까지 청했다. 그리고 교실을 나오면서 교수는 나에 대한 좋지 못한 얘기를 들었지만 자기가 최선을 다해 도와 줄 테니 마지막 학기를 잘 마치라고 격려해주었다.
다른 과목의 마지막 수업시간에는 학생 각자가 점심을 준비해와 같이 먹자는 제의가 있었다. 나는 한국인 가게에 가서 소고기를 사다가 최상의 불고기 요리를 만들었으며 만두와 잡채도 준비해갔다. 싸구려 음식에 기껏해야 피자를 가져 왔던 미국 학생들은 내가 가져온 한국 음식을 맛보고 “wonderful”을 연발하였다. 교수 역시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 보았지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적이 없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학기가 끝났다. 시험도 최선을 다해서 보았고 리포트도 점수를 잘 받았으니 마음을 편히 먹고 졸업 준비를 하였다. 그래도 시험은 주관적이니 행여 어느 교수가 P교수의 사주를 받고 C를 준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끝나기 때문에 불안하였다. P교수에게 나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더 힘들게 했다. 어느 때는 차라리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지내면 잠시 마음이 편했지만 불안함은 뱀 머리처럼 다시 머리를 들고 엄습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단지 할 수 있었던 것은 눈물로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이때처럼 하나님에게 진실되고 뜨거운 기도를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마지막 학점 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울고 말았다. 실습까지 합해서 모든 과목에 A를 받은 것이었다. 나는 성적표를 움켜쥐고 울고 또 울었다. 지난 2년간의 시간은 길고도 긴 고통의 시간이었으며 자책과 원망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생애에서 가장 뜨겁게 기도를 했던 시간이었다.
졸업식은 학교 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이 시작되자 학과장인 P교수는 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졸업장을 주었다. 그리고 학생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오자 그는 내 이름을 마지못해 작은 소리로 불렀다. 그가 어떻게 나를 부르던 상관이 없었다. 나는 씩씩하게 걸어가 졸업장을 받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내 악수를 거절하고 곧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순간적으로 당황되었지만 나는 양손을 들어 체육관 안에 꽉 들어찬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I made it! I made it!”
그리고 나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환호성을 들으며 밖으로 나왔다.
밖은 화창한 봄날이라 드높은 파란 하늘에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아니 무엇인가 가슴에 묻혀있던 것들을 토해 내고 싶었다. 지난 2년간 가깝게 지냈던 미국인 학생들이 나와 어울려 사진을 찍으면서 나의 인내심에 칭찬을 해주었다. 그리고 늦게 도착한 교인들이 안겨 주는 꽃다발을 받고 나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나래야. 돌이켜 보면 U대에서의 2년간의 생활은 가슴 아픈 것이었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 지금도 후회가 되는 것은 첫 학기에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지막 학기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몸에 화약을 지닌 채 불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자에 지나지 않았다. 부디 너는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피할래 하지 말고 먼저 타협을 하는 사람이 되거라. 그리고 소수민족이라고 해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말고 싸울 때는 당당히 싸우면서 떳떳이 살아가길 빈다.
벤 김
▲한국이름 김병학 ▲켄터키주 루이빌의 남침례신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W 주립대학에서 사회사업 석사 학위를 받았음. ▲졸업 후 필라델피아의 정신병원에서 상담가로 근무하다가 2001~2004년 필라델피아 힌인교회에서 소셜 워커로 일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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