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오후 나는 차를 몰고 바쁘게 가고 있었다.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영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길가에다 차를 세워 놓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고 있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사위와 의논이 있어서 딸애의 집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잊음의 현상」은 전에도 있었다. 한참 차를 몰고 가다가 차고(garage) 문을 닫고 왔는지 닫지 않고 왔는지가 미심쩍어 이미 집에서 상당한 거리까지 드라이브 해 왔는데도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 확인해 보면 틀림없이 그라지 문 셔터가 제대로 내려져 있음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나 혼자 쓴웃음을 짖던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뿐인가, 매일 아침에 정기적으로 입에 털어 넣는 몇 종류의 알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아예 먹지 않고 넘어 갈 때도 있었다.
나는 다시 시동을 걸고 딸애의 집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알츠 하이마」병에 걸렸던 레이건 대통령을 떠올렸다. 그 치매 병으로 인해 영화배우 시절과 대통령 시절의 그 화사하고 화려했던 광채(光彩)는 간 곳 없고 초라하고 멍청해진 그의 모습을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순간적인 잊음의 현상이 치매의 초기증세가 아닐까 하는 섬뜩한 생각에 미치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돼지 안 되고 말고 ! 나의 추한 꼴을 남에게 보이다니, 그리고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 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딸애의 집에 도착하여 딸에게 오는 길에 깜박했던 아버지의 정신상태가 치매의 초기현상인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버지에게 치매현상 이라니 그건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코웃음을 치고 마는 것이다. 딸의 말 말고도 이미 70고개를 바라보는 두 동생이 나를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사가 있다. 그건 형님이 우리 보다 더 오래 살 거요 라는 그 말이다. 옛날 같으면 형보고 자기들 보다 더 오래 살 거란 말은 벼룩 방에 똥칠 할 때까지 살라는 악담으로 받아 들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말속에는 이 나이에도 글 쓴다고 껍적거리고 일년의 반 이상을 어린이들과 어울려 연극한다고 철없는 애들같이 뛰고, 굴리고 하는 형의 처신과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기계도 가동(稼動)을 멈추면 녹이 쓸 듯이 사람의 두뇌도 쓰지 않으면 퇴화(退化) 되는 것과 같은 치매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딸과 동생들의 말대로 남달리 많은 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천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쓰는 나에게 치매현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
지난해 나는 나의 아동극작가 생활 50년을 결산하는 <주평아동극전집> 10권을 출간했다. 이는 컴퓨터 게임에 중독되어 정서심(精緖心)을 잃어 가는 어린이들을 올바른 자리로 옮겨놓는 작업의 하나인 학예회가 어느 시기에 가서 초등학교 교육헌장(敎育現場)에서 부활되었을 때 내 작품들이 학예회 메인 프로(Main Program)인 연극의 교과서 구실을 하기를 바라는 점에서였다. 마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나의 동극 <숲속의 대장간> <크리스마스 송가> 등 4작품이 초등학교 학예회에서나 교실에서 오래 동안 그리고 널리 상연되었듯이 말이다.
그리고 향후 10년 계획으로 한국문인협회 주관으로 제정한 <주평동극상>은 적어도 10명의 후진 동극작가의 배출을 바라는 소망에서이다. 이는 나의 활동의 결산이기도 하지만, 제2기의 계획을 지향(指向)하는 또 다른 출발의 신호탄으로 나는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제2기의 계획이란 다름 아닌 성극경연대회 개최였고, 또 내년부터 본국의 <월간문학>지에 한 해에 한편의 동극을 발표하기로 작정한 이의 실천이며, 내가 추진하다 이루지 못한 국립아동극장 건립의 실현 그리고 자서전 출간과 연례행사로 자리 매김 한 아동극단<민들레>의 제6차 해외공연으로 한국공연과 일본 도쿄, 중국 연변공연 계획의 성사를 위한 작업인 것이다.
아무것도 재미있는 게 없는 사람과 아무것도 좋아하는 게 없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던가 ? 과연 나는 불쌍한 사람 측에 낀 사람일까 ?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꽃 한 송이 피우고, 슬픈 열매 하나 맺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면 ...... 나는 ? 하지만, 나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 목적지를 향해 여행(旅行)을 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면, 이는 나의 지나친 나르시즘(自家撞着)일까 ?
이 해에도 어김없이 우리 집 뒤뜰 포도나무 넝쿨에 주렁주렁 달린 청포도 송이가 통통하게 살쪄가고 있다. 또 한해가 가고 한 해가 오고 있다는 세월의 흐름을 말해준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또 하나의 영상(影像)이 머리에 떠오른다.
옛날 내 어릴 적에 갯마을 바닷가에 앉아 멀리 수평선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던 지금의 내 나이의 할아버지에게 나와 개구쟁이 내 친구들이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 라고 꾸벅 인사를 하면 누구시더라라고 어린 우리들에게 존대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대답이 또 듣고싶어, 딱지치기 하다말고 몇 번이나 할아버지에게로 가서 절을 하던 그때의 영상(影像)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연극의 종막(終幕)에서 레이건의 말기(末期)같이 그리고 정물(靜物)의 석고상(石古像)같이 앉아 있던 그 할아버지 같은 치매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싶지 않기에 오늘도 나이를 잊고 이렇게 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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