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은(간호사, 국제 펜 회원)
동네 공항에서 손자와 함께 내리 신 어머니는 왼쪽 무릎을 약간씩 절고 계셨다. 작년 가을에 뵐 때는 저렇게 심하 지 않았는데 상태가 무척 나빠졌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사 위의 손을 잡고 소리나게 웃으시며 ‘미국까지 오는데 열 시간 이상, 바꾸어 타고 또 세 시간, 성한 사람도 오금이 저리겠네’하시며 괜찮다고 하셨다.
밤이 늦으셨는데도 집에 도착하자말자 어머니는 짐을 푸셨다. 스티로 폴 박스 안 겹겹이 쌓인 플라스틱 통에선 작년 가을의 묵은 김치와 명란젓, 물 좋 은 오징어가 나왔고, 강원도 산간에서만 나는 드룹, 아파트 베란다에서 말렸다는 고춧가루, 무말랭이, 취나물, 감자가루, 도토리 묵가루, 오미자차, 마른 버섯, 미 역, 김...한해 먹거리는 충분히 될만한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머니의 가방은 금세 텅 비었고 나의 냉장고와 냉동고는 잔뜩 입을 벌리고 있었다.
하 나씩 플라스틱 봉지를 풀며 이건 어떻게 만들었고 저건 어디서 뜯었으며 누가 사 준 거며 누가 손수 만들어 주었는지 일일이 설명하셨다. 오실 때마다 똑같은 상황 이라 사위는 허허거리며 주위를 맴돌고 아이는 이런 것은 미국에 없느냐는 표정으 로 작은 봉지들을 들었나 놓았다하면서 쳐다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나의 냉동고와 냉장고는 배를 불룩이 내밀며 포만감을 자랑했다.
9번째의 미국방문. 첫 번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어머니의 보따리. 연세도 있지만 아픈 무릎으로 준비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짠했다. 작고 단단한 체 구라 우리 어머니는 늙지도 않으시고 병치레도 안 하실 줄 알았는데 세월을 거를 수 없는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왼쪽 무릎의 퇴행성관절염뿐만 아니라 혈압 약도 매일 아침 들고 계셨다.
이번 미국 방문은 곧 팔순이신 어머 니가 우리들과 함께 사시기 위한 연습이었다. 운전과 영어를 못하시고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우리들이 출근한 후에도 혼자 계실 수 있는 연습. 3 개의 한국채널이 24시간 방송되는 네트웍을 설치하고 T.V.도 하나 더 장만하여 어 느 방에서든 한국 방송을 볼 수 있게 해드렸다. 건강을 위한 책, 한국 비디오, 주 간지 등도 준비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도착 다음날 아침부터 딸 도시락 싸기와 저녁 준비해 두기, 화분 가꾸기, 마당의 풀 뽑기와 반질거리게 마루 닦기 등으로 노동집약적인 일들을 먼저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오시면 눈에 띄게 될 먼지들을 내 딴에는 열심히 닦아 놓았음에도 당신의 눈에는 덜 반짝거렸으리라. 오십이 낼모레인 딸의 살림살이를 아직도 걱정하시는 팔순이 가까운 어머니는 이 번엔 철저히 함께 사는 연습이므로 어디는 여행가는 것을 하지 말자고 먼저 제안 하셨다. 이웃들과 함께 갔던 2박 3일의 짧은 온천여행이 전부였던 이번 방문. 어 머니에겐 무척 지루하고 답답하였을 그 동안 아픈 무릎으로도 온 집안을 반들반들 하게 닦아 놓으시곤 떠날 차비를 하셨다.
김치 냉장고엔 각종 김치가 꽉 찼고 조금씩 꺼내먹어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던 냉동고엔 이젠 재료가 아닌 완제품의 밑반찬들이 가득 찼다. 위에서부터 꺼내먹어라 시며 하나씩 작은 사이즈 로 포장까지 해 놓으셨다. 몇 개월 동안은 퇴근 후 지친 몸으로 돌아와 짜증내며 냉장고문을 세게 열었다 닫았다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아이가 오면 냄새 방지 용 스티로폴 박스에 담아 할머니의 솜씨를 좀 나누어주어야겠다.
3개월 은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의 말씀처럼 ‘이 한가함과 고요함’에 적응 할만 하니 가실 날짜가 되었단다. 예행 연습은 잘 되었고 다음에 오실 땐 이삿짐 꾸러미들을 어머니의 방에서 풀 예정이다. 공항에서 헤어지며 눈물을 보이시던 어머니를 안 았다. 만날 때보다 가슴이 더 철렁하게 어머니의 어깨는 너무 작고 부스러질 듯 약했다. 그 작고 약한 몸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무한한 사랑. 사는 것이 힘들다는 핑계를 늘 입에 달고 사는 아직도 철이 덜든 이 무심한 딸.
이제 그만 응석을 벗어버리고 어머니의 그 넓은 뜰을 통 채로 옮겨 올 준비를 한다. 마당 가득히 환한 빛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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