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생은 깨달은 만큼 알게되고 느끼는 것만큼 살다간다고 한다. A씨가 류시화씨의 ‘시’처럼 지금 깨달은 것 그때도 깨달았다면 아마 돈이 조금 생길 때마다 맛있는 것도 먹고, 고운 옷도 입어보고 좋은 화장품도 썼을 것이다.
은퇴 후 필요한 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을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입꼬리가 샐쭉 처지면서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거나 아니면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기도 하리라. 돈이란 쓰기 나름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숫자를 내 놓기 힘들 것 같다. 류시화씨의 “지금 알고 있는 것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라는 시집이 있다. 책 제목만 읽어도 벌써 공감이 온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조금씩 삶의 지혜가 생기고 연륜이 쌓이면서 각자 나름대로 많은 시행착오를 하며 살아온 것을 누구나 느낀다.
이민 세월이 같은 A씨가 재작년에 은퇴했다. 옛날에는 같은 지역에 이웃해 살았지만 지금은 나는 L.A.에 그녀는 뉴욕에서 살고있는 30년 지기다. A씨는 17살에 미국으로 유학 와 60세가 넘어 은퇴한 후 처음으로 고국 방문을 감행했다. 고국의 가족이나 친구들과 43년만의 해후였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는 물론 없는 돈 때문이었다. 아주 여러 해 전 겨울에 그녀를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영하의 날씨에 폭설까지 내린 그 날 자신이 경영하는 개스 스테이션에서 곱은 손을 호호 불며 손님 차에 기름을 넣어주고 있었다. 물론 남편과 함께 하는 사업이었지만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매서운 추위에도 작은 체구의 여자가 커다란 파카를 뒤집어쓰고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이 안쓰러워 내 콧등을 시큰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동안 보아온 A씨는 한번도 좋은 옷을 입었거나 값나가는 장신구 등을 지닌 적이 없다. 언젠가 A씨는 자신을 위해서는 1불 짜리 매니큐어도 안 사 쓴다고 고백해 나를 놀라게 했다.
A씨는 한국에서 명문대 재학중 의사가 되고싶은 꿈을 가지고 유학 왔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의학공부 하는 일이 쉽지 않아 불행히도 학업을 중도에 포기 해야만했다. 가진 것 없이 비슷한 조건의 남자를 만나 결혼했지만 고생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다행히 두 아들은 공부를 잘했고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모두 독립시켰다. 그동안 안 쓰고 악착같이 모아 A씨 부부는 노년을 편안히 보낼 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건물들을 사놓고 은퇴했다. 은퇴하고 바로 그녀는 걱정 없이 놀러 다닐 수 있어 좋다는 전화를 자주 해 왔다. 곧 쓰러질 듯 언제나 지치고 피곤하여 스트레스 쌓인 음성만 듣다가 오랜만에 돈도 쓰고 여행도 다닌다는 명랑한 소리를 듣고 나도 기분이 참 좋았다.
두어해 동안 잘 지내던 그녀가 며칠 전 전화로 그녀가 이제껏 살아온 날들을 많이 후회한다면서 자신이 참 바보였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녀가 계획했던 대로 다 이루었는데 무엇이 그녀를 후회하게 만들었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의아해 하는 질문에 그녀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은퇴 후 꼭 필요한 돈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각각 정부로부터 본인들 구좌에 자동 이체되는 돈이 있고 거기에 조금만 더 보태면 충분히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집값과 자동차 할부금은 안 나가는 경우다. 또한 근래에는 가지고 있는 건물의 세입자와 마찰도 자주 생겨 스트레스를 받고 병까지 얻어 마음 고생도 했다고 한다. 젊어서도 안 입던 좋은 옷 나이 먹어 떨쳐입게 안되고, 당뇨와 고혈압 때문에 하루 세끼도 신경 써 가며 먹어야 한다고 투덜댔다. 어디 그뿐인가 놀러 다니는 것도 이제는 시들하고 피곤해 집에서 뒹구는데 기껏해야 비디오나 보고 가끔 외식하는 것이 고작인데 벌어놓은 돈을 다 쓸 일도 없다는 것이다. 수십 년 간 그리운 가족이나 친구들을 찾아볼 엄두도 못 내면서 숨가쁘게 앞만 보고 달리다가 결국 무작정 많이 벌어놓고 다 쓸 수도 없는 재산 때문에 소중한 청춘만 잃어버렸다면서 푸념한다.
인생은 깨달은 만큼 알게되고 느끼는 것만큼 살다간다고 한다. A씨가 류시화씨의 ‘시’처럼 지금 깨달은 것 그때도 깨달았다면 아마 돈이 조금 생길 때마다 맛있는 것도 먹고, 고운 옷도 입어보고 좋은 화장품도 썼을 것이다. 어디 그뿐일까? 의식 통하는 친구와 가끔 전람회도 가보고 음악회도 다니면서 차 한 잔에 푸근한 마음을 담아보기도 하지 않았을까? 또한 주류사회에 합류해 잘 살아가고 있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남겨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A씨의 말대로 늙어 필요한 돈은 그리 많지 않다는데, 늙어 스스로에게 ‘바보’ 소리를 하지 않도록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하늘과 땅 그리고 자라나는 새 싹들과 더 가까워져야겠다. A씨처럼 나의 시간 또한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학신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