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한 바구니
두 서너 다스쯤 되어 보이는 소담한 장미들 속에 하얀 색 카드가 꽂혀 있었다.
카드를 꺼내는 선이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남편이 가고 나서부터 외부로부터 오는 편지나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선이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선이는 조심스럽게 카드를 폈다.
카드를 펴든 선이는 순간 얼어붙은 표정이 되더니 가늘게 신음을 토하며 작업대 앞으로 엎어졌다.
첫 마당: 일어나 기(진양조)
차르르…
연마기는 시원하게 돌아가며 오븐에서 갓 구워낸 포세린 이의 거친 부분을 매끄럽게 깎아나갔다. 확대경으로 보이는 이의 구조와 색깔이 어느 모로 보아도 완벽했다. 밝은 흰 바탕의 색조에 곱게 윤이 나는 이의 표면뿐 아니라 포세린 부분을 떠받들고 있는 칠십 퍼센트 급의 금 메탈 내부도 반짝 반짝 빛을 내며 완성된 크라운 이의 값을 보태주고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고객의 치아들과 조화돼 여하히 살아 있는 치열 속으로 편입되느냐 였다.
포세린 크라운 이는 고객의 자연 치아들 속에 심어졌을 때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고객에게 주어서는 안되었다. 그것이 치과의사의 명성을 좌우하는 대목이지만 실은 포세린 세라믹 기술자의 신경을 제일 많이 괴롭히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빨의 모양이 문제라면 그 해결은 단순한 손재주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제조된 인공 이빨이 고객의 치열 속에 들어가 어떻게 자연스러운 생명체가 되느냐 하는 데에 있었다. 무생물인 인공 이빨이 살아 있는 치열 속에 입양되어 하나의 자연치로 살아가게 하는 기술은 그래서 단순한 손재주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컨셉, 생명에 대한 개념을 품은 기술이었다.
차르르…
선이는 이의 금속 부분을 한번 더 연마한 다음 고객의 치열 본 사이에 새 포세린 세라믹 이를 끼워보았다. 이빨은 딱 하고 완전하게 맞아들었다. 세라믹 이와 기존의 이빨 본이 하나로 조화되면서 세라믹 인공 이가 한 점의 흠도 없는 자연치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휴 하고 선이의 입에서 안도의 숨이 새어나왔다. 어제 밤부터 시간을 다투며 매달린 포세린 이의 긴급 주문품을 결국 시간 내에 끝내준 것이다. 치과의사가 보내온 고객의 이빨 본으로부터 시작되는 랩의 작업은 잔일이 많은 모델 작업을 필두로 하여 왁스 작업과 금속 주물의 캐스팅 작업을 거쳐 정교한 포세린 조성과 화씨 일천 팔백도의 고열로 구워내는 마지막 세라믹 제조까지 실은 이 마지막 치열 맞추기 관문을 향한 가파른 달리기 경주였다. 아직 치과의사에 의한 고객의 이빨 끼우기 과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경주가 여유 있는 승리로 끝나리라는 것은 보증된 거나 다름없었다.
선이의 노련한 경험과 선이만이 가지고 있는 포세린 세라믹 기술자로서의 남다른 감각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손끝에서 맞아떨어지는 이빨의 감촉과 이빨과 이빨 사이에서 묻어나는 그 미세한 스침의 감각은 고객이 이 새 이빨에 대해 백 퍼센트 만족할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다. 실제로 오씨 사장 덴탈 랩에서 선이의 손을 거쳐 나간 이빨 치고 고객의 불만으로 되돌아온 이빨은 없었다. 오히려 만족한 의사들이 주문 양을 늘리는 바람에 그만큼 선이는 바쁘면서도 마음 편하게 일하고 있었다. 주인 사장의 눈치를 안보고 오히려 주인이 선이의 눈치를 보는 분위기 속에서 선이는 보다 자유로워진 탓이었다.
그러나 일의 양이 늘어감에도 사장은 새로운 기술자를 쓸 생각은 안 했다. 선이와 손발이 맞는 기술자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핑계였지만 인건비를 아끼려는 사장의 속셈은 누가 보아도 뻔했다. 그 덕에 선이의 손은 갈수록 바빠지고 때로는 피곤을 느낄 만큼 일의 양이 많았다. 그러나 선이는 랩 주인에게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선이의 나이는 이미 중년이었다. 다행히 뛰어난 기술 덕분에 버티고는 있지만 선이 나이라면 이 분야에서는 이미 할머니에 속했다. 더구나 같은 급의 기술자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고 있으니 일이 많다고 불평할 게재도 아니었다.
한 달 전 선이는 남편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몇 년 사이 악화된 지병을 잘 버티던 남편이 끝내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보름만에 세상을 뜬 것이다. 그 때도 랩 사장은 마치 자기 집안 일처럼 선이 일을 보아주었다. 장례가 끝난 후 휴가까지 주었으나 선이는 마다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랩에 출근하여 이빨과 씨름했다. 남편이 병원의 중환자실에 누워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 보호자가 할 일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랩의 일은 단 하루도 비울 수 없었다.
선이가 그처럼 랩 일에 충실한 것은 딱히 경제적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선이는 이빨과 씨름하는 동안 자신의 문제들과 시름들을 해소하고 있었다. 정교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를 붙들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어느 사이 선이는 이빨과 살아 있는 대화를 나누며 그들과 하나가 되면서 세상의 잡다한 생각들과 근심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완성이요?”
사장이 입안에 웃음을 가득히 물고 다가왔다. 그는 선이의 작업이 끝나기를 오전 내내 기다린 참이었다. 그러나 재촉 당하는 것을 싫어하는 선이의 성격을 아는지라 작업 중에는 접근하지 못하다가 선이가 한숨을 내려 쉬고 이마에서 확대경을 내려놓자 재빠르게 다가왔다. 이 제품은 주문 양이 많은 한 그룹 치과의사가 특별히 긴급하게 부탁한 것이라 사장은 그 완성을 놓고 어제 밤부터 노심초사했다. 이런 종류의 긴급 주문품을 제대로 해내면 랩의 신용이 높아질 뿐 아니라 치과 의사와의 관계도 돈독해지고 주문 양도 늘어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사장은 의사의 긴급 주문이 오면 기술자의 형편은 생각할 것도 없이 무조건 할 수 있다는 약속부터 해버렸다. 그러나 생명체인 이빨의 조성은 일을 서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요한 과정과 필요한 시간이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안 맞으면 단 하나의 이빨을 위해서도 꼬박 날을 새워야만 했다.
“잘 맞겠지요?”
선이는 이빨을 불빛에 비춰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장의 손바닥에 그것을 놓아주었다. 사장은 보물을 다루듯 소중하게 세라믹 크라운 이를 배달용 플래스틱 상자에 넣었다.
“어제 밤부터 수고하셨어요. 좀 쉬어요, 최 여사님.”
문을 나서기 전 사장은 고개를 돌려 한 마디 인사 치레를 하고는 주차장으로 달렸다. 사장은 완성된 세라믹 이를 의사에게 내밀며 거친 악센트로 “하우 두유 라이크, 써?” 하며 어떠하시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청구되는 이빨 대금은 다른 랩과 비교하여 한 단계 아래였다. 이 업종에서 별로 경험이 없는 오씨 사장이 다른 경쟁자들을 제치고 의사들의 주문을 쓸어온 비결이었다. 더 우수한 제품이 값은 오히려 더 쌌다. 그 빈틈을 주인 사장은 자신의 몸으로 때웠다. 사람을 쓰지 않고 스스로 두 사람 세 사람 몫을 해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자 사장은 마침내 자기 아내를 랩 일에 투입했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매달 정확하게 쥐어주는 월급에 재미를 붙였는지 처음과는 달리 아무 소리 없이 뒷방에 진을 치고서 랩의 온갖 잡일을 다 해내었다.
이제 머지 않아 사장의 친척 하나가 랩에 들어올 것이다. 선이가 혼자서 밤 늦게 일하던 어느 날 사장은 한 젊은 부부를 대동하고 랩에 들어섰다. 선이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요즈음 계속 일에 하자를 일으키고 있는 왁스 메탈 담당 김씨가 머지 않아 쫓겨나리라는 예감을 가지게 되었다. 주인은 선이 앞에서 왁스 담당 김씨는 기술에 비해 월급이 너무 세다는 둥 불평을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전혀 사장의 눈치를 안보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김씨는 자기 전문 파트 외에 잡다한 다른 과정까지 챙겨야 되는 오 사장식 랩 운영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김씨는 자기를 보조할 기술자가 하나 더 필요하다고 일찍부터 말해온 터였다 사장은 그 말에는 가부를 말하지 않고 때만 기다리고 있었다. 랩 일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김씨를 쫓아낼 때였다.
“선이씨, 누가 찾습니다.”
선이는 왁스 메탈 김씨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사장의 좀 쉬라는 빈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선이는 벌써 밀린 일들을 붙들고 있었다. 선이의 눈앞으로 통통한 몸매의 히스패닉 남자아이가 “썬 초이?” 하면서 다가왔다. 그는 한 손에는 종이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붉은 장미꽃이 가득한 바구니를 안고 있었다. 장미의 톡 쏘는 듯한 특이한 향이 선이의 가슴으로 물밀 듯 번져왔다. 랩 안이 금방 붉은 장미꽃 다발로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썬 초이?” 하고 남자아이가 다시 물었다. 선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장미 바구니를 내밀었다. 선이는 엉겹결에 장미 바구니를 받아 잠시 망설이다가 옆 탁자에 놓았다.
“참 화사하고 예쁘다.”
김씨가 넋두리하는 것처럼 말했다. 사장 아내가 고무 장갑을 낀 손으로 뒷 방문을 열고 삐죽이 얼굴을 내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머나, 웬 장미꽃?”
사장 아내가 감탄하듯 말했다.
“정말 예쁘죠?”
김씨가 사장 아내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그 말투에 의하면 김씨는 사장 아내의 눈치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이 명백했다.
“싸인 프리즈.”
선이는 남자아이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해주고서도 여전히 납득이 안 되는 표정으로 장미를 바라보았다. “바이!” 하면서 남자아이가 사라졌다. 두 서너 다스쯤 되어 보이는 소담한 장미들 속에 하얀 색 카드가 꽂혀 있었다. 카드를 꺼내는 선이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남편이 가고 나서부터 외부로부터 오는 편지나 물건은 그것이 무엇이든 선이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선이는 조심스럽게 카드를 폈다. 카드를 펴든 선이는 순간 얼어붙은 표정이 되더니 가늘게 신음을 토하며 작업대 앞으로 엎어졌다. 김씨가 벌떡 일어나 달려오고 사장 아내가 달려왔다.
“선이씨, 선이씨!”
김씨가 선이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소리쳤다. 선이는 천천히 이마를 들었다. 선이의 하얗게 변한 얼굴이 조금씩 핏기를 되찾았다. 선이는 눈을 깜빡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선이의 눈이 근심어린 사장 아내의 조그만 눈과 마주치자 선이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장 아내가 괜찮으냐며 선이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선이는 손을 흔들어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김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선이를 살피며 떠날 줄을 몰랐다.
“요즈음 너무 무리를 하세요. 진짜로 쉬셔야 하는데.”
김씨는 사장 아내가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는 서서히 자기 자리로 갔다. 주인 여자도 자기 뒷방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저 고운 장미는 누가 보내셨나?”
김씨는 자기 자리에 가서도 여전히 장미에 관심을 보냈다. 선이는 김씨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한 번 살며시 카드를 펴들었다. 축 생일.이라고 써 있는 일상적인 카드 말 밑에 오늘 날짜와 보내는 이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영문자로 써 있는 보내는 이의 이름은 “당신의 남편 최윤수”였다. 선이의 남편 최 윤수는 한 달 전 병원 중환자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선이는 사월 십칠일인 오늘이 바로 자기 생일인 것을 카드를 보며 깨닫고 있었다.
두 마당: 벌려가 승(잦은몰이)
주인 아내와 김씨는 퇴근하는 선이를 못내 걱정스러워 했다. 랩을 나서는 선이의 손에는 장미꽃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선이는 장미 바구니에 있는 주소를 따라 쉽게 꽃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침저녁 출퇴근하며 지나가는 가까운 상가 몰에 있는 꽃집이었다. 몰 주차장에 차를 세운 선이는 잠시 망설였다. 꽃집에 들어가 무엇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인가. 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싶은 남편의 흔적을 이렇게 뒤쫓아서 무엇 한단 말인가. 그냥 아파트로 돌아가 잠이나 푹 잘까? 남편이 떠나고 나서부터 선이는 가벼운 불면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날을 새며 일한 다음에도 잠은 예전처럼 달지를 않았다. 선이는 눈을 감은 채 차안에 가득한 장미의 향을 긴 호흡으로 들이키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할까? 포기하고 돌아갈까? 그러나 문제의 꽃집을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불가능해 보였다.
선이는 일년 전 남편이 살아 있을 때의 오늘을 회상했다. 그 날 남편과 선이는 선이가 좋아하는 식당에 가 함께 저녁을 먹은 것 외에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었다. 선물도 없었다. 남편과 그녀 사이는 그렇게 덤덤한 부부였다. 생일이나 발렌타인 데이에 특별한 행사나 선물이 오고 갈 것도 없었다. 남편이 생일에 꽃을 선물한 것도 어쩌다 가끔씩이었다. 이년 전 생일에 남편이 장미꽃 몇 송이를 랩으로 보내준 것이 기억났다. 원래 자상하기 짝이 없던 남편이 그렇게 덤덤한 남편이 된 것은 순전히 아내인 자기 탓이었음을 선이는 알고 있었다. 결혼 초기 별난 생일잔치를 준비하는 남편에게 너무 “남새스럽다”고 한마디 한 것이 죄였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덤덤하고 평범하게 넘어갔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이 그렇게 덤덤치는 않다는 것을 선이는 알고 있었다. 특이한 기질의 예술가처럼 남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그 자신도 다 헤아리지 못하고 해결치 못하는 진공 같은 빈 자리가 있었다. 그 빈 자리 때문에 남편은 평생을 방황하며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다 소진해 버린 사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선이가 느꼈던 어떤 알 수 없는 매력의 근원도 알고 보면 바로 그 빈 자리였다. 선이가 사랑하는 남편은 자신의 빈 자리 때문에 평생을 앓고 간 남자였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것이 선이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도전의 부메랑이 되었다. 서로 간에 대화하는 말수가 적어졌고 남편은 외로워보였다. 외로운 남편을 보며 선이는 자신도 외롭다기보다 오히려 스스로가 초라해짐을 느끼며 놀랐다. 남편의 빈 자리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또 다 이해도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기도 하고 속도 상했다. 임종도 못 지켜준 채 남편을 떠나보낸 지금 그 안타까움과 속 상함이 이제는 어떤 죄스러움이 되어 선이를 압박했다. 선이는 남들처럼 먼저 간 남편 때문에 외롭다고 울지는 않았으나 그 뜻 모를 안타까움과 죄스러움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했다. 남편의 흔적과 그림자는 선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선이는 결심한 듯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선이가 들어선 꽃집은 밖에서 보기보다 넓고 화려해 보였다. 진동하는 꽃향기 속에서 사람들이 꽃들로 좁아진 통로 사이를 분주하게 오고 갔다.남자 둘이 리셉션 탁자에서 꽃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하이!” 하고 남자 하나가 경쾌하게 소리쳤다. 탁자 안쪽에도 종업원들이 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중 선이에게 장미꽃 바구니를 들고 온 남자아이가 보였다. 선이는 반가운 얼굴로 그 아이에게 손짓했다. 그는 선이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에게 선이는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받아 든 아이는 궁금한 눈으로 선이를 살폈다. 선이는 탁자 앞에 있는 주인인 듯한 남자를 향해 영어로 물었다.
“이 카드와 꽃 누가 보냈어요?”
탁자 앞 남자가 카드를 건네 받았다. 옆에 남자가 카드를 바라보더니 씩 하고 웃으며 설합에서 파일 첩을 꺼냈다. 선이가 받은 꽃은 다른 꽃집으로부터 전산망을 통해 들어온 원거리 지역 주문품이었다. 선이의 생일 장미를 직접 주문 받은 꽃집은 따로 있었다. 멀리 엘에이 다운타운 쪽에 있는 꽃집이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꽃 가게였다. 종업원이 전화를 걸어 선이에게 바꾸어주었을 때 한국식 영어 악센트가 흘러나왔다. 선이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선이의 조심스런 질문에 상대방은 기대 이상으로 쉽게 답을 주었다. 장미꽃을 주문한 고객의 이름과 전화 번호를 받아 적는 선이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장미꽃을 보낸 사람은 줄리 리. 전화번호는 다운타운 지역 번호였다. 어둠이 아파트 창을 내려 덮을 때까지 선이는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내내 응접실에 앉아 생각에 잠겼으나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일단 줄리 리라는 여자와 전화 통화하는 것이 순서였다. 그래서 아파트에 돌아와 차분하게 그 여자와 통화하기로 하였으나 집에 도착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뒤죽박죽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선이의 의식은 어떤 알 수 없는 불안 때문에 혼란에 빠졌다. 랩에서 생일카드를 펴든 순간에 받았던 충격이 또 다른 모양으로 줄리 리라는 이름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줄리 리. 그녀는 아무래도 선이 자신보다 훨씬 더 젊은 여자일 것 같았다.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녀는 아내가 모르고 있는 남편의 또 다른 관계의 여자였을지도 몰랐다. 자기처럼 덤덤하고 답답한 여자가 채워줄 수 없는 빈 자리를 대신 채워주는 그런 여자. 그런 여자가 있을 수도 그리고 어쩌면 꼭 있음직도 하다는 생각이 들자 돌연 선이의 가슴속은 뼛속 깊이 스며오는 서운함과 통증으로 인해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눈가에 맺혀왔다. 인생의 뒤늦은 시기에 한 남자를 만나 오직 남편 하나 밖에 모르며 살아온 자신의 세월을 선이는 후회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남편의 마음에 어떤 작은 틈새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 일이었다. 만일 그런 틈새가 사실이라면 선이는 그 틈새를 스스로 메우어갈 아무런 힘도 없었다. 정말 그렇다면 선이는 이제부터의 자신의 삶도 버티어갈 수 없을 터였다. 선이는 남편이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오직 상대방 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삶은 선이 자신의 몫이었다. 그 대신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에 어떤 틈새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만은 견딜 수 없었다. 순간 남편과 쥴리라는 여자와의 관계가 상상 속으로 확대되면서 선이의 눈에서는 거의 소리내어 울고 싶을 만큼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과의 추억을 위해서 뿐 아니라 자신의 혼자 남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라도 남편의 그 틈새는 극복되어야 했다. 남자들이 비록 외도를 해도 그 속 깊은 마음은 절대로 아내와 그들의 가정에만 있다는 이야기에 필히 공감하는 선이였다. 남자의 그런 마음을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남편에게서 더욱 더 기대하고 있는 자신에게 선이는 놀라고 있었다.
갑자기 전화 벨 소리가 어둠의 적막을 깨뜨리며 진동했다. 선이는 놀란 가슴으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저편으로 랩 사장의 톤 높은 목소리가 낭낭하게 울려왔다. 몸이 괜찮으냐는 안부 전화였다. 낮에 있었던 일을 들은 것 같았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로 랩 사장은 바짝 선이의 안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선이는 괜찮다며 내일 일찍 출근할 터이니 염려 말라고 했다. 사장이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선이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사장은 내일 일찍 출근한다는 선이의 시원한 대답에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는 듯 예의 빈소리를 첨가했다. 이번 고비만 넘기면 한 번 여행이라도 다녀오세요. 선이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도 믿지 않고 상대방도 믿지 않는 거짓말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대는 사장이 오히려 귀엽게 느껴지는 것이 신기했다. 아마 그래서 사업도 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자기 같이 꼭 막힌 답답이는 사업에는 맞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답답이가 어떻게 쥴리 리라는 여자를 상대한단 말인가. 죽은 남편을 대신하여 살아 있는 그 아내에게 생일 꽃을 보낼 만큼 확실하게 트인 여자를 말이다.
사장과 통화가 끝나자 선이는 실내등을 켰다. 방안이 환해지면서 선이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시원시원한 거짓말장이 사장과 대화를 나눈 탓도 있었다. 선이보다 연하인 사장은 사막 한 가운데 던져 놓아도 넉넉히 살아남을 그런 인물이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돈을 떼이고(라는 것은 사장의 말이었다) 무일푼으로 엘에이에 도착하여 모진 고생 다 하다가 어찌어찌 하여 차리게 된 것이 덴탈 이빨 랩이라고 했다. 영어도 서툰 그가 미국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설득하여 주문을 받아내고 회사를 키워낸 것을 보면 때로는 그의 질긴 생존력이 존경스럽기도 했다. 선이는 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재미도 나고 힘도 났다. 사장의 말대로라면 이 세상에서 불가능은 없어보였다. 남편과의 사별의 충격을 이기고 선이가 이만큼 견디는 것도 따지고 보면 허풍장이 사장과 바쁜 일 덕이였다. 선이는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다가 문득 전화부터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쥴리 리와의 통화를 미루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선이는 꽃집 메모지를 손에 들고 또박 또박 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한 번 가더니 금방 응답이 왔다.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영어 인사말 다음 한국 말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중환자실 한국인 담당자입니다.”
선이는 예상치 못한 응답에 당황했다.
“저, 거기, 혹시 쥴리 리씨라는 분 계신가요?”
“쥴리요? 쥴리는 내일 저녁 시간 담당인데요.”
“저녁 시간요?”
선이는 그냥 더듬거렸다. 상대방은 쥴리 시간이 저녁 여섯부터 다음 날 새벽 두시까지라며 어떤 일이냐고 물었다. 선이는 이미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었다. 선이는 비로소 쥴리 리의 전화 번호가 낯이 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중환자실 남편의 상태를 묻기 위해 자신이 몇번인가 눌렀던 그 번호였다. 갑자기 선이의 눈앞으로 식탁 위의 장미꽃 바구니가 환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 마당: 되돌아 전(중몰이)
선이는 종일 말없이 일에만 열중했다. 말이 없는 선이에게 김씨도 사장도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가 덴탈 랩의 포세린 세라믹 기술자가 된 것도 사람과 시비하지 않고 오직 말없는 이빨과 말없는 씨름만 하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선이에게 가장 힘들고 두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다투며 그들과 충돌하는 일이었다. 사람과의 입다툼이야말로 선이가 가장 자신이 없어 하는 분야였다. 사람들과 부딪치며 그들과 싸워 이기는 재미로 산다는 오 사장이야말로 선이와는 가장 반대편의 사람이었다. 선이는 퇴근 시간 훨씬 전에 그 동안 밀려 있던 포세린 작업들을 모두 마쳤다. 오랜만에 일에 집중이 된 덕이었다. 일에 집중할 때의 선이의 손은 정교할 뿐 아니라 그 속도가 남보다 배는 빨랐다. 그 빠른 속도 때문에 오 사장은 선이를 꼭 붙들고 있었다. 질도 중요하지만 장사에는 역시 양이 제일이었다. 사장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는 선이를 문 앞까지 배웅하며 푹 쉬라는 인사말을 잊지 않았다.
선이는 퇴근하는 차들로 가득 붐비는 프리웨이의 반대편 차선을 달려 오후 여섯 시경 다운타운 소재 종합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한달 만에 와보는 병원의 풍경은 처음 와보는 곳처럼 낯설기만 했다. 위독한 남편을 찾아 달려오던 그 때와 떠나간 남편을 회상하며 되찾아오는 지금의 눈길이 그렇게 달랐다. 선이는 멀고 먼 옛날의 기억을 더듬 듯 병원의 입구를 찾아들어 남편이 누워 있던 중환자실 로비까지 올라갔다. 다른 곳과는 별나게 중환자실 층은 선이에게 낯이 익었다. 그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 낯이 설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있는 데스크에 가까이 가자 한국인 간호사 하나가 선이를 맞았다.
“어서 오세요. 무얼 도와드릴까요?”
“저, 여기, 쥴리 씨를 보러 왔는데요.”
“쥴리요? 잠간 기다리세요. 혹시 아까 전화하신 분이세요?”
선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전화기를 들더니 누군가와 자연스럽게 영어로 통화했다. 그리고 나서 웃는 얼굴로 선이에게 말했다.
“금방 올 거에요. 저기 대기실 있죠? 거기서 기다리실래요?”
선이는 고맙다는 표시를 하고 대기실로 갔다. 텅 비어 있는 대기실은 양쪽으로 벤치가 놓여 있고 창문으로는 다운타운의 빌딩들이 가깝게 다가왔다. 선이는 벤치에 앉아 쥴리 간호사를 기다렸다. 어떤 아가씨일까? 어떤 사연으로 내 생일에 꽃을 보냈을까? 선이는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궁금증을 키웠다. 문득 대기실 문 앞에 동그랗고 귀엽게 생긴 얼굴이 나타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은 표정에 몸매도 단정한 아가씨였다. 간호사 가운 속의 그네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게 웃는 얼굴 같았다. 세상이 이런 사람들로만 차 있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였다.
“저 쥴리에요. 최선이씨인가요?”
선이는 대답 대신 덥썩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 작고 보드라운 손이었다. 극진히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는 기분이었다. 선이는 이제까지 남편 말고는 누구의 손도 이렇게 다정하게 잡아본 일이 없었다. 수년 전 결혼을 앞둔 남편의 딸이 신랑될 남자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왔을 때에도 선이는 그 딸의 손을 이렇게 잡아보지는 못했었다. 남편의 딸은 아버지의 두 번 째 아내인 선이에게 어머니라는 칭호 대신 아주머니라는 칭호만 고집하고 갔다. 그러나 신랑 될 남자는 스스럼없이 선이를 어머니라고 불러 그나마 여린 선이의 가슴을 위로하고 선이가 넣어준 결혼식 비용 값을 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그들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자신이 죽으면 장례 같은 것도 필요 없다는 아버지의 말보다는 아버지가 남겨줄 유산이 한푼도 없는 것이 더 큰 이유였을지 몰랐다. 남편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고향의 적지 않은 토지를 어느 사회단체에 모두 기부해버려 그 토지 값이 폭등한 이후로 집안 사람들은 물론 딸과도 원수가 되어 있었다. 남편의 장례식은 그래서 더욱 쓸쓸했다. 그러나 남편은 쓸쓸한 자기 장례식을 전혀 개의치 않으리라는 것을 선이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일찍부터 자신의 무덤도 결코 만들어서는 안되고 자신의 못난 육신은 가루가 되어 이 우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다. 남은 가족에게 재산은 물론 무덤조차 남겨놓지 않으려는 남편의 무정함을 선이가 항의했을 때 “우리는 다 티끌 아닌가” 라고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었다. 선이가 사랑한 남자는 바로 그런 남자였다. 선이에게 손을 잡힌 쥴리는 공손하게 선이의 옆에 앉았다.
“고마워요. 어제 생일꽃 잘 받았어요.”
선이의 말에 쥴리 간호사는 한편으로는 쑥스러운 표정을 또 한편으로는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없이 선이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자기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선이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났다. 선이의 눈물을 바라보는 쥴리의 눈에도 함께 눈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네 마당: 끝내리 결(휘몰이)
깊고도 달콤한 잠이었다. 머리맡 장미꽃 향기에 취하여 쏟아져내리는 잠이었다. 장미꽃 다발의 품에 안겨 마치 어린애처럼 자는 잠이었다. 선이의 의식은 점점 더 깊게 자신의 잠 속으로 가라앉아갔다. 잠든 선이의 얼굴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장미꽃처럼 빛났다. 그 장미꽃들 너머로 선이는 말을 걸고 있었다. 장미의 향은 남편의 체취가 되고 장미의 붉은 잎들은 남편의 웃음이 되었다. 그 웃음을 향하여 선이는 쥴리를 화재로 삼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천사 같은 아가씨였다. 선이는 장미꽃 품에서 그 천사의 손을 잡은 채 잠들어갔다. 남편이 떠난 이후로 밤마다 그녀를 괴롭히던 그 막연한 불안과 불면이 아쉬움과 허전함이 빈틈과 죄스러움이 그리고 남편의 그 짙은 그림자와 흔적들마저도 봄눈처럼 포삭포삭 녹아내리며 사라지는 잠이었다.
환자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을 혼자서 감당해보기는 처음이라 했다. 쥴리는 이제 막 훈련을 마치고 중환자실 현장에 배치된 새내기 간호사였다. 일상적인 중환자실 점검을 하며 최 윤수 환자실에 들어선 쥴리는 환자의 갑작스러운 용태에 당황했다. 의식이 없이 조용하기만 하던 환자가 돌연 산소 호흡기를 걷어내고 거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환자가 내는 소리는 예사로운 신음 소리가 아니었다. 환자는 어떤 의미를 말로 표현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쥴리의 귀가 자신도 모르게 환자의 입으로 가까이 갔다. 환자는 단속적으로 같은 소리를 되풀이하며 양손으로는 허공을 갈랐다. 쥴리는 환자의 양손을 잡아 쥔 채 사력을 다하여 환자의 말뜻을 따라갔다. 쥴리는 마침내 환자가 내는 소리의 의미를 조합해낼 수 있었다. 처음 말은 두 개의 숫자였다. 다음 말은 꽃 이름이었다. 갑자기 환자의 손이 풀어지고 그의 소리도 멎었다. 쥴리가 데스크로 달려나왔을 때 환자는 이미 그의 마지막 숨을 거두어내고 있었다. 담당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의 사망을 확인하고 있을 때 쥴리는 자신이 한 생명의 임종을 지켜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신이 나가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쥴리는 비로소 최윤수 환자의 차트를 살필 수 있었다. 환자 보호자 겸 배우자인 선이 최의 생년월일과 긴급 연락처인 직장 주소가 그녀의 눈앞으로 확대되어 왔다. 화사한 장미꽃 한 바구니가 천상의 향기를 뿜으며 그녀의 가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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