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논설위원)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내 눈에는 국민들이 모두 지치고 지친 분위기였다. 이제껏 아무리 어려웠어도 어느 날엔가는 ‘새벽이 오지 않겠나’ 하고 기다리곤 했었다. 그런데 안기부 엑스파일 사태가 이번에 또 터지면서 모두가 기력을 잃은 듯 허탈감에 빠져있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희망이 또 다시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국민들은 좌절하고 실망하다 보니 이제는 나라를 못 믿고 보따리라도 싸 가지고 이민 길에 오르겠다는 사람들로 줄을 이룬다.
국민의 80% 이상이 테이프의 내용을 다 공개하라고 아우성이지만 그러자니 꼭대기에서 하다못해 말단공무원까지 안 걸릴 자가 없어 정부는 이 사태를 무마시키려 적법이니, 불법이니 하며 진땀을 빼고 있다. 나라가 이 지경이면 그런 국가의 국민들은 어디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국민들은 오로지 “언젠가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하나 쥐고 살아왔는데 이 희망마저 없어진다면 무얼 붙들고 살 것인가 걱정이다.
가난한 농부가 집안에 있는 논 팔아 밭 팔아 자식을 서울까지 보내 공부시킨 것은 다 ‘희망’ 하나 때문이다. 자식이 훗날 공부를 마치면 잘될지 안될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 과정에서 ‘졸업만 하고 나면 잘 되겠지’하는 희망 하나 때문에 힘든 줄도 모르고 빚이라도 대서 학비를 대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식이 졸업 후 엉뚱한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면 그 부모는 희망이 사라져 살 의욕이 없어진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바라보던 희망이 사라진 게 문제다.
희망을 갖고 돈을 대던 그런 부모들이 많은 덕에 한국의 교육열은 대단히 높지만 이로 인해 알게 모르게 자식이 잘못돼 절망해서 죽은 노부모가 한 둘이 아니라고 한다. 한 가정이 그럴진대 하물며 4000만명이 사는 나라 전체는 어떠하겠는가. 한국은 전체 국민 중 2% 만이 “나라가 참 좋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이들은 바로 하루아침에 땅으로 벼락부자가 돼 그 이자만으로도 평생 놀고먹고 살아도 다 못쓰고 죽는다는 졸부들이다.
돈도 써본 자가 쓴다고 졸지에 생긴 돈을 부모들은 쓸 줄 몰라도 그 자녀들이 유흥가, 환락가를 돌아다니며 흥청망청 종이처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위한 놀고먹는 유흥업이 발달, 하다못해 동네 어귀까지 술집, 음식점, 노래방들이 즐비하다. 가격이 싼 음식점이나 옷가게는 잘 안돼도 백화점과 값비싼 음식이나 물품을 취급하는 업소들은 찾는 고객들로 하루종일 붐빈다.
또 다른 부류의 2%, 이들은 소위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로 여유는 있게 살지만 속으로는 ‘한국은 한심한 나라’라며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사는 자들이다. 나머지 96%의 국민들은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상위권 5%가 83%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보니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팽배, 대부분의 국민들은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다. 젊은이들은 하나같이 집 값이 너무 올라 평생 벌어도 집을 갖지 못한다는 절망감으로 노력하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월셋방 사는 사람까지 너도나도 차를 사 가능한 즐기면서 재미있게 살다 죽겠다는 생각으로 입고 먹고 노는데 정신이 쏠려 있다. 좁은 나라에 차는 왜 그리도 많은지... 자동차 산업이 세계 5, 6위라더니 정말 이를 대변이라도 하듯 자동차가 골목마다 집 앞까지 즐비하다.
한국은 어디가 서울인지 모를 정도로 곳곳이 다 아파트촌으로 변하면서 도시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집 없는 사람 수는 많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자란다고 집을 자꾸 지어대지만 이유는 10채 이상의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수가 10만명이나 되고 한 사람이 집을
20~40채씩 갖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민들에게서 희망은 사라진지 오래라고 한다. 한탕주의, 황금만능주의, 배금주의 사상이 싹트면서 사회는 각종 범죄로 병들어 가고 있다.
이를 보고 해외 한인들은 “에이 일찍 이민 잘 왔어” 하고 말한다. 그것은 이 땅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증거이다. 미국은 열심히 살면 기회가 있고 꿈을 이룰 수가 있는 곳이다. 희망이 있기에 우리는 죽어라 노력하고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다. 희망이 없
으면 죽음이요, 곧 절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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