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한국문인협회·본보 주최 제2회 한글백일장 일반부 입상작
(7월16일 그리피스팍에서 개최)
일반부 시 장원
나의 여름
두고 온 고향
한 더위에 늘어진
신작로(新作路)!
세월을 안고 선 어머니 마냥
말없이 고향을 지킨 포플러
나무마다 깊이 패인 피부엔
검버섯처럼 덕지덕지 붙은 매미군단(軍團)이
흙 빛 삶 속의 아린 이야기들을
터진 펌프처럼 연신 쏟아 붓고 있다
아롱거리는 목마른 자갈길엔
생각 없는 트럭만 간혹 오갈 뿐
신작로는 한줄기 소나기를 꿈꾸며
지독한 열병(熱病)에 잠겨있다
덜렁이는 다리 밑 웅덩이에 몸을 던져
쓰린 등 허물 벗기려던 까까머리 소년은
이제 집으로 간다
한 손에 든 깡통 속엔
붕어 입이 연신 가쁜 숨을 몰아 쉬고
한 손엔 검정 고무신 포개들고
타박타박 혼자서 걷고 있다
긴 그림자 드리운 신작로를
조무제
일반부 시 우수상
나의 여름
함성은 하늘 끝을 향해 사라져 버리고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건 언제나 빈 가슴
그 끝자리에는
민주, 독재, 군사 등의 단어들이
땀으로 뒤범벅이 된 체
최루탄 냄새를 붙잡고 뒹굴고 있었다
그 해 여름은 무척 더웠었지
군화 발에 짓밟혀 찢기고 깨져버린
내 젊음을 추스르고 수거할 틈도 없이
진압봉에 쫓기어 막다른 골목으로 달렸던 여름
그때 헤어져버린 내 젊음은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을까
꽤 많은 시간이 삶을 데리고
내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아직도 풀지 못하고 있는
그 여름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쳤던
전경의 검고 슬픈 눈빛
나는 그 눈빛을 내 젊음 대신
가슴속에 가두고 살아간다
그 해 여름은 내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가
소금기 얼룩진 전투복 속에서
나를 막아섰던 그는
잃어버린 검은 눈빛대신 핏발 선 눈으로
어디에선가 나처럼 삶을 앞에 두고
뜀뛰기를 하고 있겠지
아직도 풀지 못한 실타래가 한 짐은 되는데
얼마나 더 묵주 알에 세월을 덧칠해야
가슴속에 갇힌
그 검고 슬픈 눈빛을 풀어줄 수 있을까
배병윤
■산문장원
나의 여름은 나의 자랑이다
큰아들이 치과의사가 되고, 작은 아들이 소방관이 되면 우리는 모두 함께 여름선교를 떠나려고 한다.
나에게는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남편과 키가 장대만큼 크고 근육질로 우람한 체격의 두 아들이 있다. 그들의 손은 솥뚜껑 만하고 발은 오리발만큼이나 크고 목소리는 바윗돌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처럼 굵고 깊다. 길을 걸을 때, 남편은 앞서고 두 아들은 호위병처럼 나의 양옆에서 나와 발을 맞추며 걷는다. 일년 중에 이런 날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이런 날의 나는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자신 있고 자랑스럽다.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나의 남편은 목사님이고 아빠를 닮아 마음이 넓고 잘 생긴 큰아들은 솥뚜껑 만한 손으로 사람들의 작은 입을 벌리고 이빨을 빼고, 치석을 긁어내고, 잇몸을 치료하는 치과 대학원 졸업반이며, 가슴이 따뜻하고 매력적인 둘째 아들은 우람한 근육질의 팔로 불 속에서 사람을 구해내는 소방관이 되려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 세 남자를 모두 더운 여름에 만났다.
나의 첫 번째 남자인 마음이 넓은 나의 남편은 울산의 태화강변에서 만났다. 수십 마리의 모기에게 다리를 뜯기며 여름 내내 데이트를 하다가 8월의 한 중간에 약혼을 했다. 에어컨도 없는 작은 식당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약혼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그는 너무 가난해서 친구에게 양복을 빌려 입고 나왔다고 말했었다. 육남매의 맏아들인 그와 칠남매의 맏딸인 나는 교회 목사님과 양가의 어머니, 그리고 각자의 동생들 중 한 사람을 차출해서 대표로 참석시켰다. 우리는 그 더운 여름날에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고 오늘까지 30년을 함께 살아왔다.
나의 두 번째 남자인 잘생긴 큰아들은 6월 장마가 막 끝나고 불볕더위가 시작되던 어느 해 여름에 나에게로 왔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그와 나는 긴소매 옷을 입고 뜨끈뜨끈한 온돌방에 나란히 누워 사랑을 나누기 시작했다. 목욕은 꿈도 꾸지 못했고 선풍기는 아예 근방에도 두지 못하게 금지된 구역 안에서 땀띠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마주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모자의 정을 나누었다. 손바닥에까지 땀띠가 난 그의 앙증맞은 손을 만지며, 땀내 풀풀 나는 젖가슴을 열고 젖꼭지만 겨우 물수건으로 닦아 그의 입에 물리면 그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나의 분신이 되어 갔다. 젖이 많이 나온다는 말에 하루에 여섯 번씩 양푼이 만한 미역국 그릇을 비워내던 나는 그에게 헌신적인 엄마였다. 나의 두 번째 남자는 이렇게 해서 나의 대단한 아들이 되어갔고 나는 그의 유일한 엄마가 되어갔다.
나의 세 번째 남자인 가슴이 따뜻한 둘째 아들은 8월의 한복판에서 만났다. 우리 부부의 약혼기념일을 지난 그 다음날 느닷없이 급하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여름 장마도 지나고 찌는 듯한 더위도 주춤했지만 온돌방에 드러누워 몸조리하기에는 너무나 괴로운 날씨였다. 농사를 지으시던 친정어머니는 나를 도와주실 여력이 없었고 시어머니는 사나흘 미역국을 끓여주시더니 남편의 무슨 말이 서운하셨다고 역정을 내시면서 산모를 팽개치고 떠나 버리셨다. 고등학생인 친정동생을 데려다 놓았지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큰아이는 동생을 장난감 말로 생각하고 말타기를 일삼으니 큰아이 살피는 일이 더 큰 일이었다. 식욕을 잃고 미역국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이는 젖이 모자라 항상 보채곤 했다. 큰아이는 동생을 말 삼아 타다가 얻어맞아 울고 작은 아이는 젖이 모자라 울고 나는 힘들고 짜증나서 울었다. 우리 셋은 그렇게 울면서 사랑을 나누어야만 했었다.
이렇게 만난 작은 두 남자는 그 이후 여름만 되면 연례행사처럼 땀띠의 선수가 되었다. 온몸에 땀띠가 생기고 얼굴에 생긴 땀띠는 부스럼이 되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낫지 않아 ‘헌데박사’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그들이 다섯 살이 될 때까지 그놈의 땀띠는 계속 되었고 그들은 해마다 ‘헌데박사’로 불려야만 했다. 반면에 나는 여름만 되면 온몸이 화끈거리는 산후병을 얻어 지옥 같은 밤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다리 근육이나 발바닥은 얼음주머니를 대고 식히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서 온 식구들을 긴장시키곤 했다. 아이들의 땀띠는 4, 5년에 끝났지만 나의 산후병은 해가 거듭될수록 더 심해질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해, 그들이 열 한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우리는 공부하러 오신 아빠를 따라 미국에 왔다. 미국에 온 이후, 여름은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두 아들은 아빠와 함께 여름마다 물개처럼 수영장과 바다와 산 속의 강들에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나의 산후병도 해가 거듭될수록 낫기 시작했고 우리는 여름만 되면 산과 바다로 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프고 힘들었던 여름은 점점 잊혀져가고 이제 우리는 즐겁고 의미 있는 여름을 계획하고 있다.
큰아들이 치과의사가 되고, 작은 아들이 소방관이 되면 우리는 모두 함께 여름선교를 떠나려고 한다. 아프리카나 남미, 만약에 북한의 문이 활짝 열리면 북한의 여름을 만나고 싶다. 가난한 그들의 여름을 시원한 여름으로 바꿔주고 싶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나의 여름은 진주를 만드는 조개의 아픔이었다. 덥고, 땀띠 나고, 괴롭고, 아팠어도 그때마다 진주는 만들어졌고 나는 그것들을 실에 꿰었다. 나의 여름은 이제 진주 목걸이가 되어 내 목에 걸려있다. 세 남자와 그들의 꿈과 나의 꿈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가 되어 나의 목을 우아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박옥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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