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역사는 문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도시 국가가 생겨나자마자 국가 간의 분쟁을 피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외교 사절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일이 있을 때마다 대사를 파견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이 때 보내지는 사절단은 집권자의 친척이거나 그 나라 최고위층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방 국가에서 믿음을 갖고 협상을 벌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국가 간의 약속이 깨지거나 전쟁이 날 경우는 볼모로서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1979년 이란에서 회교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 대사관에 쳐들어가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은 것은 이런 오래된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는 외교관이 제대로 공무를 수행하려면 외국에 상주해야 하며 여러 특권이 인정돼야 한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됐다. 이에 따라 외교 공관은 자국내 있더라도 남의 나라 영토로 간주돼 공권력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며 외교관은 범법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체포해 자국 법으로 처벌하기보다는 추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자기 나라 외교관 보호에 가장 신경을 쓴 나라는 가장 잔인한 군대의 하나로 알려진 몽골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파견한 대사를 해친 나라는 주민을 몰살시키고 땅을 초토화했다. 몽골 대사는 어느 나라 직업 외교관보다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최근 들어 통신 수단의 발달로 외교관의 역할이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여전히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상징성에 있어서는 그 중요성이 조금도 덜 하지 않다. 미국과 같이 선거에서 이긴 당이 정치적 후원자에게 대사 자리를 나눠주는 관행이 있는 나라도 주요 국가 대사는 외교 전문가에게 맡긴다. 또 피지나 사모아 대사 같이 남태평양의 바닷바람만 쏘이면 되는 자리도 자기 당을 오래 후원한 사람, 도덕적 흠결이 없는 사람에게 배분하는 것이 원칙이다.
요즘 한국에서 홍석현 주미대사가 1997년 대선 당시 한국 주요 언론사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사실 상 이회창 후보의 정치 참모 역할을 했으며 선거 자금을 전달하는 ‘배달부’ 역할을 한 것을 입증하는 테이프가 공개돼 소란스럽다. 미국에서 뉴욕타임스 사장이 케리 후보 참모로 뛰면서 수백만 달러의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불과 7~8년 전 한국의 정치와 언론, 기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는 점에서 몹시 부끄러운 일이다. 한가지 알 수 없는 것은 입만 열면 개혁을 부르짖는 노무현 정부가 어째서 그런 인물에게 아직까지는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인 미국 주재 대사 자리를 맡겼는가 하는 점이다. 국정원이 갖고 있던 그런 정보를 대통령이 안 채로 임명했다면 상식 밖의 일이고 몰랐다면 더 큰 문제다.
더군다나 홍 대사는 그 때 일로 ‘괘씸죄’에 걸려 김대중 정부 시절 탈세로 감옥까지 갔다 온 인물이다. 또 최근에는 위장 전입으로 부동산 투기 의혹까지 받았다. 한마디로 한국의 지도층이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비리를 골고루 저지른 셈이다. 그러면서 불과 얼마 전 주미 대사가 되자마자 유엔 사무총장을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까지 흘렸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물론 홍 대사 측 주장대로 그 당시 한국 사회를 벗겨보면 정치인, 기업, 검찰, 언론 할 것 없이 비리와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몇 안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더더구나 세계 외교관의 총수로 내세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공직은 깨끗한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
소위 X 파일 공개로 홍 대사는 물론 그런 인물을 기용한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은 흠집을 입었다. 지금이라도 그를 사퇴시키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상처를 최소화하는 길이라 본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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