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시간 : 2005-07-15
SF한인상의 대표단과 함께한 ‘백두산 등정기, 천지 상봉기’
=========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천까지 밤새워 12시간(현지시간 2일 새벽 5시20분 도착). 성수기라 인천→연길 직항로 여석이 귀해 일단 인천에서 장춘으로 2시간(오전 10시40분 도착). 장춘에서 오후 3시40분까지, 비행기 지연출발로 다시 4시 너머까지 기다렸다 겨우 연길행. 오후 6시쯤 연길 도착. 숙소에 들를 겨를도 없이 조철학 연길시장 일행이 기다리는 연길호텔로 직행. 독주를 곁들인 만찬. 때늦은 숙소이동. 장거리 여행 피로와 독주의 만남으로 짐을 푸는둥마는둥 곧장 깊디깊은 잠. 지난 3일 SF한의상의(회장 유대진) 대표단의 ‘백두산 그리고 천지’와의 만남은 그런 피로를 뚫고 이뤄진 것이었다. 몸은 고난의 행군이었지만 마음은 환희의 행군이었다.
3일 오전 6시10분. SF상의 대표단을 태운 연길시청 소유 25인승 버스는 숙소 고려호텔을 출발했다. 백두산까지는 약4시간. 모두들 피로가 2,774미터 백두산처럼 쌓였지만 백두산 가는 길인 만큼 새벽 5시쯤 일어나 고양이세수를 하고 밥 한술 뜨고 하나같이 제시간에 버스에 올랐다.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안내를 맡은 연변대 관광학부 3학년 윤은희 씨는 프로답게 첫 멘트부터 달랐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주관도 뚜렷했다. 저는 한민족이고 중국인입니다.
서둘러 자기소개를 마치고 부르하통하(하천)-진달래광장-광장 너머 주공안국 등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버스가 요소요소 지나칠 때마다 친절하게 설명하던 윤 씨는 잠시 설명할 만한 풍광이 뜸해지자 백두산 얘기를 꺼냈다. 백두산 산신령께서 좋은 날씨만 하사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이유가 있었다. 맑은 날 올라가도 구름 때문에 비 때문에 천지 구경을 못하기 일쑤인데, 때마침 연길은 장마가 시작돼 도착 첫날(2일)부터 우중충했다.
====
천지 구경 갔다가 천지 못본 사람이 천지라는데…
장쩌민 주석은 3차례나 올라 한번도 못봤다는데…
====
천지 구경 갔다가 천지를 못본 사람들이 천지라는 말이 있지요.(최영준 연길시 외사판공실 부주임) 백두산 날씨가 하루에도 여덟번씩 바뀐다고 해서 성질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사람을 성질이 백두산같다고 합니다.(차국진 연변예술대 교수) 장쩌민(강택민·전 중국) 주석은 3차례나 백두산에 올랐지만 천지를 한번도 못봤지요.(강광훈 연변예술대 원장)
6시40분쯤, 안개비는 기어이 장대비로 바뀌었다. 차내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빗줄기는 더 굵어졌다. 백두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대형버스가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좁은 길 맞은 편에서 철퍽철퍽 달려와 지나쳤다. 덤프트럭이 흙탕물을 흘리면서 교행했다. 삽이며 곡괭이를 든 허름한 차림의 농부들이 비를 흠뻑 맞고 어디론가 걸어가다가, 늘 봤으면서도 또 보면 또 신기한지 차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유심히 바라보았다. 차는 휙 지나쳤다. 그럭저럭 산천어로 유명한 유수천을 지나고 석문을 지났다. 안투시엔(안도현)에 닿았다. 오른쪽으로 아시아최대 비구니사찰 돈화정각사 안내판을 스쳤다. 곧 왼쪽으로 바다같은 호수가 나타났다. 안도저수지 명월호였다. 야산 한 굽이 지나고도 호수는 이어졌다.
7시30분을 넘어 버스가 멈춘 곳은 복만구, 복이 가득하다는 뜻의 산간촌락이었다. 사슴으로 유명한 곳으로, 녹용 녹용차 사슴가죽핸드백 등 온갖 ‘사슴 상품’들과 약초 상품들을 전시해놓은 큼지막한 상점이 관광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조금 가늘어지긴 했지만 빗줄기는 여전히 부지런했다. 아랫녘이 맑아도 올라가면 비바람칠 때가 많다는데 아랫녘이 이 정도면… 걱정들이 태산, 아니 백두산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버스는 다시 빗속에 김을 뿜었다.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윤 씨가 박수장단에 맞춰 어머나 한곡조를 뽑았다. 백두산 언저리에서 좋은 물건 싸게 사는 요령을 일러줬다. 그러면서 그는 예전에 어느 관광객이 눈치없이 가이드가 이러더라 저러더라는 식으로 값을 깎으려해 험상궂은 장사치 눈치를 보느라 뜨끔했던 예를 들며 성격이 조폭한 사람들을 만나면 큰일 나니까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개중 질량이 담보가 안되는 물건들이 많다며 아무데서나 충동구매를 하지 말라는 말도 곁들였다.
백두산에만 나는 진달래 비슷한 꽃으로 만드는 감칠맛 일품 뒤끝 산뜻 ‘들쭉술’, 꼭대기 부분에만 잔솔이 돋아 파마머리처럼 보이고 껍질은 마치 사람 피부색을 띠는 매끈한 ‘미인송(백두송)’, 역시 백두산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쥐오줌풀’과 ‘흰파랭이꽃’ 등 350여종의 야생화 야생초, 피나무만 찾는 입맛 까다로운 벌들이 만드는 ‘피나무꿀’, ‘장뇌삼’과 ‘산삼’ 등등…. (여대생이어서 그런지 그 유명한 백두산 뱀술 얘기는 하지 않았다.)
8시25분쯤 온갖 진귀한 보물들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만보를 지날 때까지 안내원의 백두산 예비교육은 그칠 줄 몰랐다. 비도 그칠 줄 몰랐다. 백두산에서 발원해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송강하(하천)는 황토색 흙탕물을 콸콸 내려보내고 있었다. 괴물이요? 모릅니다. 1994년에 봤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그 담으로는 본 사람이 없습니다. 천지 괴물 얘기에 백두산 산신령의 귀가 번쩍 뜨였을까. 돌연 비가 그치고 옅은 햇볕이 오르막 산길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9시쯤 참나무 자작나무 백양목 소나무 등 이깔수(침엽수) 숲이 시작되는 송강을 지날 때는 내리쬐는 태양열과 금세 데워진 지열이 합쳐져 차안이 후끈거렸다. 보이지 않는 어느 산골마을로 이어지는 어귀인 듯 온통 푸른 숲 틈새로 난 길 양쪽 키큰 나무 목덜미쯤에다 걸어놓은, 중국 오성기(국기)와 똑같이 새빨간 바탕에 샛노란 글씨로 全黨全民全力00이라고 쓴 현수막이 몹시 눈에 거슬렸다.
9시30분쯤, 아뿔싸, 다시 비와 안개가 교대로 넘실거리며 멀리서 날아온 길손들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에이 또! 참지 못하고 누가 내뱉었다. 그러지 마세요. 여기서는 몰라요.! 말괄량이 조선족 안내원이 제지했다. 그리고는 자청해서 윤동주의 서시를 낭송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그는 길손들의 주의를 숲 쪽으로 돌렸다. 잎들을 보세요. 파르르 떨리면 위(천지근처)에서 날이 궂고 축 처지면 맑답니다. 아무리 봐도 어떤 잎들은 떨고 어떤 잎들은 처진 것 같아 위쪽 날씨를 예감할 수 없었다. 그 친절한 안내원도 그 해답만은 귀띔을 안해줬다(뒷자리 필자가 깜박 못들었는지도 모른다).
9시50분쯤, 푸른 숲 일색이던 시야에 울긋불긋 제법 요란한 마을이 들어왔다. 조선족풍정원-. 우리식으로 말하면 조선족민속촌이었다. 차는 엉금엉금 그냥 지나치는데 풍정원 끝자락 공마당에 세워진 농구대가 왠지 어색하게 보였다. 풍경이 정상을 되찾았다. 굵어지는 듯하던 빗줄기도 사라지고 다시 맑아졌다.
10시20분쯤, 척 봐도 거의 다왔다 싶었다. 모텔 호텔 여관, 길 양쪽으로 숙박업소들이 즐비했다. 사이사이 식당이며 온천이며 가게들이 저마다의 냄새와 저마다의 색깔로 나그네들에게 연신 윙크를 해댔다. 일행이 ‘잠시 실례’를 위해 들른 곳은 장백산국제관광호텔. 첩첩산중에 우뚝 솟은 송신탑이 거슬린다 싶어 반대쪽(산아래 방향)으로 눈을 돌렸더니, ‘不登長白山綜生遺感(부등장백산종생유감·장백산에 오르지 않으면 평생 유감이로다)’-. 1983년 8월1일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등소평)이 백두산(장백산)을 등정한 뒤 썼다는 돌간판이었다. 다시 정상쪽을 보니 수백년 수천년 세월동안 풍화에 못이겨 한줌두줌 무너져내리고 끝내는 또다른 산처럼 거대한 돌무더기를 이룬 정상 언저리가 펼쳐졌다. 그 돌들이 어느순간 발딛고 선 그곳까지 굴러내려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바위들은 거의 90도 각도로 꼿꼿하게, 위태롭게 선 채로 서로 엉겨붙어 있었다. 그 사이사이 혹은 그 위로 덮여진 만년설은 먼지를 뒤집어써 누르스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10시50분, 천지는 일단 아껴두고 장백폭포를 먼저 찾았다. 차에서 내려 쉬엄쉬엄 약 20분을 걸어올랐다. 천지에서 갓 나와 장백폭포가 된 물은 족히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만져도 손이 시려웠다. 그런데 물에 깎여 반들반들해진 바위 너머로 따스한 물도 흘렀다. 그것은 내려오는 천지물이 아니라 솟아나는 온천물이었다. 두 갈래 물은 바위를 지나면 합쳐서 적당한 온도가 됐다. 폭포를 배경으로 죄다 사진찍기에 바빴다. 사진용 한복을 빌려주는 곳도 있었다. 검게 그을린 아낙네는 어디서 구했는지 뉴욕양키스 모자를 쓰고서 좌판에 크고작은 지도와 열쇠고리 따위 자잘한 기념품들을 진열해놓고 폭포구경에 흠뻑 빠진 외지인들이 폭포에서 등을 돌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 천지로 걸어올라가는 길도 있지만, 시간상, 내려돌아 차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걸어내려 약15분. 올라갈 때 눈도장만 찍고 지나친 온천물 계란집(집이 아니라 간막이 있는 원두막 같다)에 들렀다. 섭씨 85도. 계란은 금방 삶아졌다. 옥수수도 그랬다. 지름이라야 어른 팔 로 한아름쯤 되는 얕은 웅덩이는 시멘트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 주변에 한족 청년 너댓명이 둘러앉아 왁자지껄 떠들며 돈 주고받고 계란과 옥수수를 넣고빼느라 바빴다. 한 청년의 낡은 윗도리 호주머니는 12시도 안됐는데 돈이 꽉 차 벌찜했고 왼손 가득 지폐가 쥐어져 있었다. 이름을 물었더니 웃기만 했다. 6월부터 9월까지 이곳을 세 내는 데 91만위안. 11만달러가 넘는 돈이다. 그쪽 사람들의 대졸 초임이 한달에 1,500위안(연길신문 기자의 경우 1,200위안)에 불과한 데 비해 어마어마한 투자다. 그러나 수지맞는 장사임은 물론이다. 장마철인 7월초 하루벌이가 대충 2,000위안. 성수기인 7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는 하루에 7만-8만위안을 번다고 한다.
11시40분, 파리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잠시 내리막’을 위해 올라탄 버스에 어느새 파리 몇 마리가 동승해 뭔가 보챈다. 구름이 몰려올라왔다. 비구름 같았다. 누군가 말했다. 그래 올 바에는 어서 와서 어서 지나가버려라.
11시58분, 버스에서 내려 10여분 기다린 뒤 짚차로 갈아탔다. 다시 오르막. 버스는 갈 수 없단다. 모름지기 진정한 백두산 정상행, 천지행은 거기서부터였다. 짚차가 짚차만의 길로 들어서는 가파른 입구에 일주문 같은 문이 서 있고 나무현판에는 흘림체 한자로 천지(天池)라고 새겨져 있었다. 짚차는 늘 가는 길이면서도 힘겨운 듯 잦은 기침을 하고 가래처럼 매연을 쏟아냈다. 굽이쳐 돌 때마다 차도 몸도 휘청했고 그 때마다 속이 뜨끔했다. 특히, 내려오는 짚차와 코너에서 교행할 때는 꼭 부딪힐 것만 같아 머릿발이 섰다. 그러나 소매 없는 언더셔츠 차림의 청년 운전사는 왼손에 쥔 담배를 여유있게 피워가며, 질 나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한국유행가를 들어가며, 잘도 몰았다. 개인 날씨는 더욱 맑아졌다.
12시5분. 시야가 확 트이고 귀가 먹먹해졌다. 위로만 보이던 숲이 아래로 보이기 시작했다. 간간이 보이는 나무는 바람에 시달리느라 키 클 틈이 없었다. 커봤자 듬성듬성 박힌 바위보다 높은 건 별로 없었고 그나마 거의다 드러누운 상태였다. 손에 잡히지도 보이지도 않는 바람이 그 높은 곳까지 터잡은 그 끈질긴 수풀들을 그렇게 납작 엎드리게 만든 것이다. 그 틈에 자라난 야생초 야생화들이 바다를 이룬 채 백두산 천지로 가는 마지막 길목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12시10분, 마침내 짚차마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백두산 기상관측소 앞에 닿았다. 모두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 왕바람이 뺨을 휘갈기더니 온몸을 마구 두들겼다. 바람의 회초리를 원없이 맞으면서 걸었다. 걸어서 올랐다. 숨이 찼다. 오르면서 올려보고 돌아보았다. 위로는 천문봉, 불과 몇십미터. 옆으로 뒤로 아래로는 흰구름 먹구름이 뒤섞여 휘돌았다. 그 아래로 아득한 밀림. 성깔을 부릴까 노심초사했던 햇볕은 조금 전 그대로. 그것만 해도 힘이 솟았다. 한발두발 걸어서 올랐다.
12시15분. 드디어 올랐다. …. 마침내 보았다. …. 그리고 느꼈다. …. 그 느낌은 말로 옮길 수 없었다. 그 시원의 바람을 맞으며 그 시원의 천지를 바라보는 그 느낌을 세속의 말로 정리한다는 건, 나로서는 애당초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렌즈에 담아오면서 프로 중 프로임을 자부했던 어느 사진작가는 백두산 천지를 담으면서, 담아서 옮기면서 이 사진은 사기다고 고백했다. 그 사진으로 백두산이, 천지가 뿜어내는 그 어떤 기운을, 백두산과 천지가 속삭이는 언어까지 담아낼 수 없음을 절감했기에. 또 이 세상 모든 것을 글로 담아온 어느 작가는 그 순간을 다만 말없음표와 느낌표로 대신했다. 또 어느 통일운동가는 댓바람에 넙죽 큰절을 올리고는 펑펑 울기만 했다. 또 어느 말발 좋고 글발 좋은 기자는 입도 얼고 손도 얼어 넋나간 사람처럼 마냥 서있다 내려온 뒤 ‘그 순간의 느낌’을 울컥 두마디로밖에 정리하지 못했다. 또 어떤 이는 정작 그놈의 천지를 보는 순간 눈이 흐려져 천지를 보고도 천지를 보지 못했노라고 읊조렸다. 또 어떤 이는 천지에다 대고 어머니를 목놓아 불렀다. 또 어떤 이는….
난들 별 수 없었다. 드디어 오르고 마침내 보고 그리고 느꼈다고 했지만, 실은, 첫 느낌은 무감각이었다. 거기에 오르는 순간, 그것을 보는 순간, 뭐라고 소리칠까 내심 생각해뒀지만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까지 까맣게 잊었다. 눈도 멀었다. 귀도 멀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천지를 내려본 건지 맞은편 다른 백두봉들을 본 건지 알 수 없었다. 한참뒤에야, 앞서 오른 일행들의 탄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누더기 군복차림 청년들이 오가며 사진을 찍으라고 채근하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부동자세로 얼어붙은 것 같았던 저 멀리 떼구름이 실은 매우 빠르게 떠다니고 있음도 깨달았다.
삐걱삐걱 나무 구름다리를 건너 장백폭포로 향할 때 이거는 외도(우리땅 북한이 아니라 중국땅에 난 길이라는 뜻)야. 백두산은 백두대간을 타고 평양으로 해서 안쪽으로 올라와야 되는 거야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던 일행의 고참 구본태 전 국회의장 비서실장(현 서울여대 교수)이 뾰족바위를 아슬아슬 타고올라 홀로 말없이 천지를 굽어보고 있었다.
구 실장. 그는 통일부 남북대화사무국장 통일원 통일정책실장을 지낸 통일전문가로 평양을 4차례나 방문하고 연변지역을 대여섯차례나 드나들었지만 백두산행은 여태 미뤄온 사람이었다. 마음에 꼽아둔 길로 오르고싶다고. 백두산도 모르는 백두산 전설까지 꿰고 있을 정도인 그에게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관광의 대상도 등정의 대상도 아니었다. 꼬박꼬박 ‘백두산 참배’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그에게 외도를 경유한 이번 백두산행은 따라서 엄청난 ‘파계’였다. 두툼한 뿔테 안경 속에서 그의 두 눈은 천지를 담고 있었다. 천지가 천지물을 품은 것처럼 그의 눈은 눈물을 머금었다.
천문봉을 껴앉듯이 나는 두팔을 벌렸다. 입으로 코로 시원의 바람이 빨려들었다. 그것은 곧장 목젖을 타고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두 팔을 벌린 채, 천지를 향해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천지는 말이 없었다. 저 멀리 북한측 초소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했다. 햇살을 받아 비늘처럼 희끗거리는 실물결이 아니라면 그날 그 순간 천지에 담긴 물은, 하늘의 누구조차도 아직 입대지 않은 듯한 그 물은 물이 아니라 고체라고 해도 될 것이었다. 바위산 쪽 천지는 바위산을 머금고, 만년설이 남은 응달쪽 천지는 응달에 묻힌 만년설을 거의 그대로 되비칠 뿐, 통 말이 없었다. 최고수심 384m.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천지는 누워서 하늘을 응시하고 하늘은 엎드려 천지를 내려다보았다. 수천 수만년동안 하늘과 천지는 그렇게 무언의 대화를 해왔을 것이다.
=======
하늘은 천지를 내려다보고 천지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백두산 봉우리들은 그옛날 그날부터 그자리를 지키며
=======
병사봉(장군봉, 2,744m) 향도봉(2,712m) 쌍무지개봉(2,626m) 청석봉(2,662m), 백운봉(2,691m), 차일봉(2,596m) 등등. 천지 주위로 빙 둘러서거나 몇발치 떨어져 백두산의 어깨를 받치고 선 봉우리들도 하늘이 열리고 백두산이 솟아나고 천지가 태어난 바로 그날부터 늘 그 자리를 지키며 하늘과 천지를 벗삼아 살아왔을 것이다. 그 백두산 어느 자락에서 그 천지 물을 마시며 우리의 조상들은 새 생명을 잉태하고 그렇게 이어진 생명들이 오늘의 우리가 되었을 것이다.
오후 1시1분, 하산. 관측소 앞에서 이미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던 짚차몰이 청년은, 우리가 몇번이고 천문봉쪽을, 그 너머 천지쪽을 향해 뒤돌아보며 마지못한 걸음으로 오르자마자 곧장 브레이크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또 고개를 돌렸다. 먼지 묻은 차창으로 천문봉이 보였다. 그 너머 천지는 하늘에 비친 듯한 천지로 대신해야 했다. 천문봉도 천지도 시야에서는 이내 사라졌다. 그럴수록 뇌리에서는 더욱 또렷이 살아났다. 살아서 움직였다.
정작 천지를 마주할 때는 숨죽였던 가슴이 그제서야 마구 요동쳤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던 감각기관들과 상상주머니들은 비로소 마음놓고 부지런을 떨었다. 북한땅이라 아직은 갈 수 없는 2,774미터 백두산 최고봉도 몇번씩 오르내렸다. 384미터 천지 밑바닥도 훤히 보이는 듯했다. 외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평양에서 버스를 타고 백두산으로, 철따라 그렇게 오가는 꿈들이 떼몰려 왔다가 떼몰려 사라졌다. 멀리 구름들도 내리막길 짚차 정면을 들이받을 듯 떼몰려 왔다가 떼몰려 사라졌다. 파란 풀 마른 덤불 큰 바위 작은 바위 틈새에서 앙팡지게 피어난 흰꽃 노랑꽃 보라색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을, 온몸을 흔들었다.
왼쪽 중간에 앉아 차창밖만 바라보던 구 실장은 짚차가 일주문을 벗어나 버스대기소에 다다를 때까지 한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내릴 때 봤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물이 고여 있었다. <정태수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