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미국을 가능하게 한 인물을 하나 들라면 첫손으로 꼽히는 사람이 조지 워싱턴이다. 당시 세계 최강이던 영국군과 싸워 예상을 뒤엎고 승리한 데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왕이 될 수 있었는데도 이를 사양하고 은퇴했으며 나중에 대통령이 된 뒤에도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에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낙향했다.
미국의 전통인 평화적인 정권 교체, 군에 대한 민의 우위, 최고 권력자라도 임기를 마치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는 모습 등등이 모두 그의 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자진해서 권력을 내놓은 워싱턴을 본 영국 왕 조지 3세는 “그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인물”이라고 평했다.
워싱턴 다음으로 초창기 미국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4번째 연방 대법원장을 지낸 존 마샬을 든다. 링컨처럼 프런티어의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 그는 34년간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연방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입법, 행정, 사법 3부 중 사법부의 우위를 확립시킨 사람이다.
15명의 자녀를 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독립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다 제대한 후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공부, 변호사가 된다. 법률 이론에 밝을 뿐 아니라 대인관계가 좋았던 그는 승승장구, 제2대 대통령인 애덤스 때 국무장관을 거쳐 대법원장이 된다.
1803년 취임한 지 얼마 안 돼 그가 내린 마베리 대 매디슨 케이스는 당시까지 불분명하던 연방 대법원의 위치를 헌법 서열상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곳으로 자리잡게 했다.
사건 내용은 애덤스 행정부 말기에 관직에 임명된 마베리가 애덤스의 정적이자 후임자인 제퍼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이를 이행치 않자 국무장관 매디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 이 때 마샬은 마베리가 근거로 인용한 모법이 연방 헌법에 배치되기 때문에 무효라고 판시, 대법원이 의회가 승인하고 대통령이 서명한 법을 휴지로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천명했다. 마샬은 그 후에도 30여 년간 긴 세월 동안 재산권 존중, 계약 준수의 원칙, 주간 통상에 대한 연방 정부의 규제권 등에 관한 중요한 판결을 잇따라 내려 수많은 선례를 남기기도 했다.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었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 판사가 은퇴를 발표하자마자 그 후임자가 누가 될 것이냐에 정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오코노 판사는 보수 진보가 반반으로 갈려 있는 연방 대법원에서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캐스팅 보트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후임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여성계에서는 오코너가 첫 여성 대법관이었다는 점을 들어 여성이 지명된다고 주장하고 있고 라티노 쪽에서는 표를 의식하고 있는 부시가 최초의 라티노 대법관을 지명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연방 의회와 백악관을 장악한 보수파들은 일찍부터 사법부를 자기 쪽 인물로 채우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이를 추진해 왔다. 오코너에 이어 80 고령에 갑상선 암을 앓고 있는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까지 사임할 경우 부시 대통령은 향후 사법부 진용을 결정적으로 재편할 수 있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를 정하는 것이 국내 문제에 관한 한 부시 행정부 최대의 결정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종신직인 연방 대법관은 부시가 2009년 물러난 후에도 수십년 동안 낙태와 어퍼머티브 액션 등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결정을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연방 대법원이 돈줄을 쥔 의회, 칼자루를 쥔 행정부 위에서 미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슈에 대해 최종 발언권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주권자인 국민이 이를 용인하기 때문이다.
선거로 뽑히지도 않은 9명의 판사가 미국인들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단점인 인기 영합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소신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장점이 크다는 여론이 아직은 대세다. 차기 대법관 지명을 둘러싼 싸움이 볼만할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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