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사상 첫 여성 연방대법관이란 것을 빼면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우리들에게 그다지 낯익은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지난 주말부터 미 전국의 톱뉴스로 부각된 그의 은퇴소식에 그의 업적을 되짚어보며 그의 떠남이 우리 일상에도 큰 타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코너는 일반 미국인들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대법관이었다. 낙태, 종교등 미국사회 주요이슈에 대해 극단적인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그의 견해는 보통사람들의 여론과 흐름을 같이 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존경과 사랑을 받아온 법조인이었다.
애리조나 목장에서 성장한 그는 20세기 후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큰 인물의 하나로 꼽힌다. 대통령이 4번 바뀐 지난 24년동안 정치압력의 무풍지대인 연방대법원 판사로 봉직하며 미국을 격렬하게 휩쓴 정치적 사회적 변화의 방향에 균형을 잡아왔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 주변에선 아침마다 흔히 이런 농담이 오갔다고 한다. ‘오늘 판결은 어떻게 나올까’ ‘현재 4대4이니까 결과는 오코너판사가 아침을 뭐 먹었는가에 달렸지’ - 그날 케이스의 승소 여부는 오코너에 달렸고 많은 변호사들은 승리의 열쇠가 오코너의 마음을 얻는데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미국제도의 핵은 헌법에 의해 움직이는 정부다. 헌법조항 하나하나가 보통사람의 일상을 좌우하는 실질적 의미를 갖고있다. 이 헌법을 해석하고 적용하여 개인의 삶을 보호하는 힘을 가진 기관이 연방대법원이다. 연방대법원은 현재 진보 4명, 보수 4명, 중도 1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이념적으로 팽팽하게 맞서는 이 법정에서 스윙보트를 쥐고 상당수 케이스를 5대4로 결정지은 중도파가 바로 오코너판사였다. 그래서 대법원은 ‘오코너 법정’으로 불리웠고 ‘우리 모두는 오코너의 아메리카에서 살고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1981년 레이건에 의해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을 때만 해도 그의 존재는 첫 여성 대법관이라는 상징성이 절대적이었다. 하긴 당시 사회 환경이 그랬다. 스탠포드법대를 3등으로 졸업하고도 여자라는 이유로 법률회사에 취직을 못했고 대법관 첫 출근날 여자화장실이 없어 당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여성이란 사실은 그가 판결에서 행사한 영향력에 가리워졌다.
지난 24년간 오코너는 낙태에서 어퍼머티브 액션, 정교분리, 정부권한등 미 사회의 가장 감정적 이슈에서 확고한 중립의 보이스를 대변했다. 2000년 대선때는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재검표 결정을 위헌으로 판결, 부시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테러 전쟁을 구실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데 대해 부시를 책망하는 의견서를 쓰기도 했다. 정부의 권한을 존중했으나 법원이 장애인 편의시설을 만들지않고 장애인에게 층계를 기어오르거나 누가 안고 들어오라고 명한 데 대해 주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에선 장애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낙태가 위법이 되어선 안되지만 약간의 제한은 필요하다, 어퍼머티브 액션에 있어선 다양성은 유지하되 강제적 쿼터는 곤란하다’ - 이런 그의 견해를 보수주의자들은 너무 진보적이라고 비난했고 진보주의자들은 너무 보수적이라고 불평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생각은 보통 사람들과 비슷했고 대부분 그의 판결은 말없는 다수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는 추상적 이론이나 원칙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는 법 이론보다는 그 법이 보통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먼저 생각했다. 법의 원리보다 사람을 중요시 한 것이다. 같은 이슈라도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될 수 있다면서 개개인의 입장에 따뜻한 시선과 관심을 가졌다.
이슈가 아닌 케이스에 따라 찬반을 달리하는 그의 중도적 판결은 특히 보수진영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 자기가 살아있는 헌법이냐’는 비난도 들었고 법철학과 법이론에 약하다는 폄하도 당했다. 또 법관으로서의 그에 대한 평가를 역사가 어떻게 내릴지도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강경보수의 물결이 점점 거세게 휩쓸고 있는 미 주류사회 다수의 횡포를 아직도 종종 느낄수 있는 마이너리티에게 그동안 오코너의 합리적인 상식은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의지가 되어왔다. 그의 뿌리는 보수였으나 그는 아웃사이더, 불우한 소외계층, 약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법관이었다.
오코너의 갑작스런 은퇴선언은 요즘 미 전국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그의 후임지명을 겨냥한 보수와 진보의 ‘우리사람 넣기’ 기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여름을 뜨겁게 달굴 이념대결의 시작을 지켜보면서 그의 빈자리가 상당히 클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오코너판사가 있음으로 해서 약자들에게도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었던 미국이 그의 떠남으로 해서 폐쇄된 사회로 뒷걸음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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