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키가 작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키가 작지 않았던 적이 없었던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이민 올 때까지 교실에서 줄곧 앞자리를 지켰었다. 딱 1년 정도만 출석부가 두 자리수였었고 나머지 때에는 모두 한 자리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교실에서는 앞자리에 앉으니까 칠판도 잘 보이고 선생님하고도 가까와서 더 좋았던 것 같았다. 물론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졸 겨를은 없었지만 말이다.
필자의 키가 작은 이유는 아마 ‘외탁’을 해서 그런 것 같다. 필자의 아버지는 결코 작은 키가 아닌데 어머니가 아주 아담 (?) 하시다. 그런데 고집이 센 것은 아버지 쪽을 닯았는데 키는 어머니 쪽을 닮은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두 아들녀석들도 제 아버지를 닮아 큰 키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작은 키를 갖고 살면서 그렇게 크게 불편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물론 어렸을 때 버스를 타고 가면서 키가 작아 손잡이를 제대로 잡지 못했던 경우도 있었다. 또한 농구 시합에서 리바운드와 배구 시합에서 스파이크는 할 꿈조차 꾸지도 않는다. 아예 포기하니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래도 평소에 공부를 잘 했기 때문인지 키가 작다고 급우로부터 놀림을 받지 않고 지낸 것 같다.
키가 훨씬 더 큰 사람들이 많이 있는 미국에서는 오히려 더욱 괜찮다. 아마 미국사람들이 워낙 크기에 체격으로 그들을 쫓아간다는 것은 아예 엄두를 낼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한 지도 모르겠다. 한국에 있을 때는 오히려 약간의 키 차이를 갖고서도 서로 크네 작네 했지만 이 곳에서는 워낙 차이가 심해 그럴 필요도 없고 말이다. 또한 동양사람들이 백인 보다 평균적으로 키가 작기에 작다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도 않다.
그러나 필자가 키가 작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살아 왔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키가 작은 게 마음에 걸리는 적이 가끔은 있기 때문이다. 교육위원직을 수행하면서 여자들하고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있는데 악수만 갖고서는 부족할 때가 있다. 그런데 상대방의 키가 필자보다 한참 더 커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고 필자가 뒤끔치를 들어 올려 포옹이나 키스를 할 때면 조금은 우습게 보일 수가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여럿이서 사진을 같이 찍을 때 뒤쪽에 서면 얼굴이 보이질 않는다. 키 큰 교육위원들 사이에 끼어 찍을때는 가능하면 필자 다음으로 키가 작은 교육위원 옆에 서보려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릴 적도 있다. 그리고 키가 큰 여자들 사이에 파묻히게 되는 경우 아예 사진을 찍고 싶지 않을 때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봄에 참석했던 어느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키가 작은 것이 그렇게 쑥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보여준 한 학생이 있었다.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고등학교중의 하나로 알려진 토마스 제퍼슨 고등학교의 졸업식장에서였다.
사실 오래 전서부터 그 학교의 학생회장이 한국학생이라고 해서 한 번 만나보고 싶었는데 졸업식장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우수한 고등학교의 학생회장이 한국학생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러웠고 연설도 들을 수가 있어 기분이 흐뭇한 졸업식이었다. 그런데 이 학생회장의 키도 필자와 비교해 그렇게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더욱더 반가왔는 지도 모른다.
연설을 하기 위해 부회장인 여학생과 연단에 같이 섰을 때 여학생의 키가 머리 하나 만큼은 클 듯하게 보였다. 고정이 되어 있는 마이크를 둘이 같이 사용해야 했기에 과연 어떻게 할까 하고 주시했는데 필자의 상상을 초월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키 작은 회장이 자신의 의자 밑에서 받침대를 꺼내어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 아닌가! 아마 평소에 그렇게 해 온 모양인지 웃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받침대를 꺼내어 올라설 때까지의 과정도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도 없었고 말이다.
키가 작은 것은 핸디캡이 아니다. 창피할 일도 아니다. 약간 불편할 수는 있지만 극복할 수 없는 불편을 극복하는 이 학생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필자에게 많은 감동을 주웠다. 필자도 필요할 때 쓰기 위해 앞으로는 받침대를 하나 가지고 다닐까보다.
문일룡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