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명으로 북한 소설에 등장한 적이 있다. 북한 작가 조수희가 쓴 ‘함장의 웃음’이라는 소설로 조선작가동맹 기관지인 ‘조선문학’96년 1호에 실려 있다.
꽤 긴 분량의 이 소설에는 ‘단편실화소설’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소설이긴 하지만 실화가 바탕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 소설의 존재는 평양에 갔다 온 한 지인이 “재미있는 것 봤습니다.”하며 조선문학 한 권을 건네주는 바람에 처음 알게 됐다.
그보다 일년 전 나는 평축 참관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 ‘논픽션’은 당시 나의 북한 내 행적, 좀더 정확하게는 지난 68년 나포된 후 북한 해군 홍보함으로 사용되고 있던 푸에블로호를 방문했을 당시를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에서 나는 ‘남조선 일간신문 XX일보 CA지사 사회부장 안상호’로 나온다. 이 소설에서 나는 외모 묘사에서부터 함장에 비해 상당한 손해를 보고 있다. XX일보 안 부장은‘안경 속에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쪼프린 50대의 체소한 사나이’인데 비해 상대역 장규정 소좌는 ‘보통 키에 가슴은 쩍 벌어졌는데 눈길이 얼마나 예리한지 금시 사람의 속을 밑창까지 꿰뚫을 것 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푸에블로호는 영해를 침범한 간첩선이었다는‘사실’을 알게 된다. ‘전쟁까지 각오하면서도 배를 넘겨주지 않은 것은 이 잘난 배가 탐나서가 아니라 민족의 존엄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소설 속에서 안상호는 갈수록 쩨쩨해지고, 장규정은 갈수록 멋있어진다. 소설에 따르면 ‘한평생 미제의 앞잡이로 살아온 안상호’는 함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호탕한 웃음의 소유자이기도 한 함장의 당당한 태도를 통해 마침내 민족의 자존을 깨닫고, 개과천선하게 된다. 온갖 이야기가 길지만 간추리면 대충 그런 류의 내용이다.
이 소설을 실화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 왜 이런 실명소설을 써서 사람을 떡으로 만들어 놨을까. 우선 작가는 이 잘난 소설을 내가 절대 볼 리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내가 쓴 방명록의 일부 내용이 빌미가 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을 방문하면 수시로 방명록이란 걸 쓸 일이 생긴다. 푸에블로호 함상에 비치된 방명록에 내가 뭘 썼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여기 와서 (북한측이 말하는) 또 다른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정도의 내용이 포함됐던 것 같다.
방명록의 내용은 인사치레이긴 했지만 분단상황에서는 남북 어느 쪽 주장도 전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유신체제 등 군부 독재의 전횡을 체험했던 우리 세대는 남북 두 체제의 정상은 적이면서 동시에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버팀목이자 동반자라는 역설적 관계도 맺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관변 정보에 주로 의존하던 한국 언론의 북한 뉴스는 쓴웃음을 짓게 할 정도로 엉터리가 많았다. 북한관계 기사처럼 한국의 언론이 당당하게 오보할 수 분야도 없었다. 왜냐하면 보도의 사실여부 확인이 불가능했고, 오보라도 누가 항의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근 10년 전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이 에피소드가 아직 갖고 있는 현재성 때문이다. 남북 교류는 갈수록 일상화되고 있으나 얼마 전에는 바로 이 방명록 때문에 LA의 한 인사가 곤욕을 치렀고, 한국 고위관료는 북한서 불렀던 유행가가 문제돼 서울에서 집중포화를 맞았다.
축전 등 행사 때 북한에 가면‘조선 중앙 떼레비’기자가 마이크를 코앞에 디밀며 소감을 묻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당신들, 문제 있어, 이거 엉터리 아냐”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정성껏 손님을 대접하는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컨대, 만경대 등을 방문하고 온 날 저녁 호텔에서 ‘중앙 떼레비’를 켜면 LA에서 간 목사님도, 스님도, 리커 주인도 다 LA서 들으면 딱 책잡히기 좋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문제는 그 대응이다. 언제까지 그걸 갖고 분기탱천하고,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식의 대응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소설일 망정 사람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떡으로 만든 것은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하지만 그걸 갖고 왜곡이니, 어쩌니 하면서 항의할 생각은 없다. 으레 그 정도일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아직 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면 다른 한 쪽에서 대범하게 그 정도 수준은 뛰어 넘어 버리는 것, 그것이 진일보한 남북관계를 이끌어 내는데 중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상호 부국장·특집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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