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개의 추억 안고 어머니로 사업가로…
‘눈이 큰 아이’ 강주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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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 확성기에서는 잘살아보세 새마을노래 조국찬가 같은 관제노래들이 쉴새없이 울려퍼졌다. 축음기에서는 물레방아 도는데 가슴 아프게 나그네 설움 같은 대중가요들이 밤낮없이 흘러나왔다. 꽉 째인 청바지에 통기타를 둘러맨 장발족의 집단출현, 꾀꼬리 소리 대신 오만상을 찌푸리며 일부러 목젖을 짓이겨 쇳소리를 내는 듯한 ‘신중현과 그 악당들’의 출몰은 숫제 반란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대부분 대마초 등 죄목으로 당국의 철퇴를 맞았다.
영화판 회오리도 모질었다. 삼발이 용달차에 탄 가두선전대원이 절규하듯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영화 아니면 보라 저 늠름한 우리 국군의 위용을 따위 영화들이 주류를 이뤘던 그 시절, 고리타분한 어른들 눈에 귀때기에 피도 안마른 것들이 하란 공부는 안하고 어른 흉내를 내면서 싸가지없는 짓거리를 일삼는 ‘고교얄개’(1976년, 원작 조흔파·감독 석래명)의 등장은 혁명이었다.
주연 이승현(두수) 진유영(영호) 강주희(인숙) 김정훈(호철) 정윤희(두주) 하명중(상도)-.
고교얄개가 극장가를 풍미(당시로선 어마어마한 26만 관객동원)하면서 이들 고교생 스타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제목에 얄개가 섞이면 일단 흥행성공. 고교얄개 주역들이 대학에 들어간 80년대 초에는 그 주역들이 본명으로 출현하는 ‘대학얄개’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들도 세월 앞에는 무력했다. 세칭 쎄라복(세일러복)이 잘 어울리는 단발머리 여고생 임예진의 얼굴이 화장품에 제법 익숙해지고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눈이 큰 아이 강주희의 두 눈이 어슴푸레 뭔가 아는 듯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던 무렵, 그러니까 8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얄개라는 밀물은 차츰 썰물이 되어갔다. 그 주역들은 혹은 남고 혹은 떠나고….
주님을 알고 강같은 평화를 얻고
월넛크릭서 조용한 삶 새로운 삶
다시 한 세월이 흘렀다. ‘낀 세대’라는 측은한 이름으로 불리는, 지금은 중년이 된 얄개세대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몇년전부터 서울 세종로나 종로통 다방이나 술집에 꾸역꾸역 모였다. 물론, 간판도 인테리어도 생판 몰라보게 달라졌지만. 모여서 이야기하고 노래했다. 입심좋은 어느 평론가는 ‘낀 세대의 재림(또는 반격)’이라 이름붙였다. 방송가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얄개시대 추억이 담긴 낡은 필름들을 돌리며 향수와 호기심을 연신 자극했다. 2002년이 저물어갈 무렵, 얄개대왕 이승현이 얄개이후 삶에 실패해 여인숙을 전전하는 가난한 중년이 돼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서 동정심까지 보태졌다.
강주희를 찾아라!
친구의 친구까지 캐물어 얄개스타들을 거의다 찾아낸 어느 TV방송사는 아무리 뒤져도 보이지 않는 강주희를 찾으려고 뭉툭한 현상금(?)까지 내걸었다. 끝내 실패했다. 그때 내 친구가 전화로 ‘내가 신고해서 돈이나 탈까보다’라고 말해 한참 웃었지요.
UC어바인에 진학하는 맏딸 상희, 노스게이트고교에 다니는 둘째딸 준희와 막내아들 창배, 이렇게 세 자녀와 함께 월넛크릭에 살고 있는 강주희 씨는 지난 24일 해거름에 어렵게 성사된 인터뷰에서 여기 온다니까 동료 기자들이 부러워하더라는 기자의 너스레에 현상금 걸린 방송 얘기를 들려준 뒤 여기서도 아직까지 기억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다니 고맙지요라며 웃었다.
초등학교 때 신성일 감독·주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에서 깜짝데뷔하고 고교얄개로 뜨고, 대학얄개를 마지막으로 은퇴(82년)하고, 남자의 여자로, 방송사 진행자로, 사업가로, 세 아이의 엄마로…. 그 큰 두 눈으로도 죄다 담아둘 수 없을 만큼 세상이 휙휙 바뀐 80년대와 90년대, 그 역시 정신없이 바빴다. 그러다 샌프란시스코가 좋아서 2000년 3월11일 이곳으로 이민왔어요. 애들 키우면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그냥 조용히 묻혀 살았지요.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자존심섞인 표현으로 어려움도 좀 겪었다.
그렇지만 플레젠트힐 은혜의빛 장로교회(담임목사 강대은)에 나가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미처 몰랐던 평화를 만났다. 5년 잠수 끝에 요즘 뜸뜸이 한인들과 골프를 치는 등 소설가 윤대녕이 정의한 ‘세상(한인사회)을 향한 턱걸이’를 시도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새로운 의욕도 생겼다. 새로운 사업이다. 그게 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아니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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