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이라는 에세이집을 읽으며 피식, 웃음이 나왔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 ‘칼의 노래’의 작가이기도 한 김 훈 씨가 핸드폰에 대해 쓴 대목을 읽으며 그랬었다: “지난여름에는 핸드폰을 윗주머니에 넣고 다녔더니, 신호가 올 때마다 젖꼭지가 부르르 떨렸다. 아,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나를 부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말문을 열자고 보내오는 신호가 내 젖꼭지를 부르르 떨리게 하면서 가슴으로 파고들다니! 나는 진동 신호가 올 때마다 핸드폰이 사랑스러웠다. 나는 더 이상 핸드폰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직도 컴퓨터를 거부하고 연필로 꾹꾹 눌러 글을 쓴다는 작가, 그리고 무게 있는 글을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작가가 일개 핸드폰을 두고 밉다, 사랑스럽다, 라는 표현을 한 것이 왠지 우스웠다. 핸드폰은 그저 핸드폰인 것을.
아, 그리고 불과 한 달도 못 돼 나에게도 핸드폰을 사랑했다, 미워했다 하는 일들이 연달아 생기고 말았다. 지난 달, 고국을 방문하던 중 나주에 있는 시댁 선산에 성묘하러 가는 길이었다. 간 김에 근처 마을의 먼 친척 되는 아재를 찾아 뵙기로 하고, 차안에서 시동생이 핸드폰으로 전화를 넣었다.
“......아, 네, 웃길 논에 계시다고요. 그리로 가겠습니다.”
아재는 “논에서 모내기를 하고 있으니 집으로 가지 말고 그리로 오라”고 하셨단다. 남편과 나는 눈이 동그래져 서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제는 논에서 모내기를 하다가도 핸드폰을 받는구나! 그렇게 해서 연락이 닿지 않았더라면 그 분을 보지 못했을 생각을 하니 그 아재의 핸드폰이 얼마나 신통하고 사랑스럽던지.
서울에서는 물론 핸드폰의 위력이 더 쉽게 눈에 띄었다. 전철 안의 세 명의 승객 중 하나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거나, 메시지를 체크하고 있거나, ‘울려라, 울려라’하고 주술을 거는 듯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거나, 문자메시지를 날리고들 있었다. 눈을 감고 무표정하게 있는 승객들에 비해 핸드폰과 놀고있는 승객들의 모습은 한결 행복해 보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문자로 날리면서, 막 헤어진 친구와 다시 아쉬움을 나누면서, 사랑하는 이에게서 날아온 사랑의 문자메시지를 들여다보면서,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는 기다림의 행복(?)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겠고.
한 번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여섯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벤치에 앉아 핸드폰으로 열심히 문자를 치고 있었다. 엄마 마중을 나왔는데 버스가 몇 대 지나도록 엄마가 오지 않으니 “엄마 지금 어디 있어?”하고 문자를 날리는 걸까, 아니면 엄마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을 친구와 문자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어쨌든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서울 시민의 손에 들려있는 모든 핸드폰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사랑이 미움으로 돌변한 것은 인천공항에서 출국수속을 할 때였다. 탑승을 이미 시작한 후라 조금 조바심이 난 터였다. 우리 짐을 체크하고 좌석배정을 하던 항공사 여직원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은 그녀의 책상의 정면에 일등 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직원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와의 대화를 재깍 중단하고,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아주 세련된 손짓으로 폴더를 열었다.
“.... 응, 아주 좋았어. 다시 만나기로 했어. 그럼. 그런데 엄마, 나 지금 좀 바쁘거든. 이따가 내가 다시 걸게.”
“나는 많이 바쁘거든! 당신이 데이트 보고하는 내용을 들어줄 마음의 여유가 없거든!”이라고 나는 속으로만 외쳤다. 그리고 죄 없는 핸드폰이 미워졌다. 그 애물단지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아무래도 올 여름에는 나도 윗주머니가 있는 옷을 입어야 할까 보다.
이영옥 엔지니어·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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