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은 언제나 내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은 첫사랑이다… 높은 돌담 너머로 흰 구름 한 움큼씩을 봉긋봉긋 던져 올린 듯 백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어느 한 사람 먼저 말 한마디를 꺼내진 못했지만 두 볼만은 마음 들킨 듯 붉었다.
백목련 한 그루를 심었다. 목련의 꽃말이 연모(戀慕)라고 하니 마냥 그리움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목련은 산수유와 개나리가 피는 이른 봄, 잎보다 먼저 우아한 옥 색깔의 꽃을 피우고 난초꽃 같은 향내를 낸다 해서 옥란(玉蘭)이라고 한다 했다. 또한 꽃봉오리가 붓끝을 닮았다고 해서 목필(木筆)이라고도 한다 했다.
백목련은 언제나 내 마음자리를 떠나지 않은 첫사랑이다. 고교 시절, 화창한 어느 봄날이었다. 그 때 유명 시인이셨던 M선생님께선 전교 문화행사의 서막인 백일장 시제를 발표하셨다. ‘사월’이라고 하셨다. 학생 천 이백 여명은 모래바닥을 스미는 봇물처럼 모두 시상을 떠올리기에 편한 조용한 장소를 찾아 흩어졌었다.
그날의 장원 시를 기억할 순 없지만 제목은‘사월의 잔디밭’이었다. 등교 길에 만나지곤 했던 하얀 세일러복 여학생을 목련화한 시상이 몇 구절 들어있었다. 높은 돌담 너머로 흰 구름 한 움큼씩을 봉긋봉긋 던져 올린 듯이 백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꽃가지 아래서 단물 오른 송기 가지처럼 까뭇하고 도툴했던 안면의 눈길들이 마주치곤 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먼저 말 한마디를 꺼내진 못했지만 두 볼만은 마음 들킨 듯 붉혔었다.
백목련 같은 연인을 그렸다. 그런 인연은 사십년이 걸린 어느 민족의 엑소도스처럼 그리도 멀고 긴 세월을 맴돌아야 했던 건지 모르겠다. 그것을 예견했던 것이었을까? 사회의 초년생 딱지를 겨우 떼었던 시절이었다. 어느 지인의 묘목 장에서 불문곡직하고 백목련 한 그루를 파왔다. 상품으로 치자면 아직 덜 자란 것이어서 주지(主枝)는 야들야들한 숫처녀의 허리 같았고 앞가슴의 옷깃을 살짝 부풀린 듯 했던 꽃눈이 나를 들뜨게 했다. 고향집 양지바른 화단에 심어놓고 들고 날 때마다 보고 싶었던 그 백목련. 이국의 나그네 되어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을 이 봄도 그 옛날처럼 꽃을 피우고 있을까.
백목련은 온화한 표정에 목이 약간 긴 듯한 여인처럼 꽃 모양새가 우아하다. 그리고 한 방향을 향해서만 꽃을 피운다고 한다. 그런 화심이었기에 사람들은 사려 깊은 정서와 역사 앞에 숙연해졌을 게다. “새벽종이 울리네 새 아침이 밝았네...” 그 때 ‘보리 고개’를 넘으려는 결연한 의지는 온통 호응을 받으며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었다. 거기는 그 운동의 최고위 수련장이었지만 어쭙잖은 직분 덕에 나는 제2기생으로 입소했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여, 만인은 그 일을 위하여.” 그 비슷한 글귀도 현관에 걸려 있은 것 같다. 각 행정단위의 선발 자들과 각료 그리고 ‘푸른 집’의 비서와 특보도 모두 같은 옷을 입고 함께 숙식을 했다.
“한 송이 흰 목련이 봄바람에 지듯이/ 아내만 혼자 가고/ 나만 남았으니..” 결국 그분도 그 시만 남겨놓고 그렇게 떠나갔다. 해마다 그 뜰의 백목련은 피었다 지곤 했을 게다. 지금도 역시 그러할 게다. 그렇지만 그 뒤를 이은 그 집 주인들이 나라와 백성의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닦으려고 꽃샘바람과 맞서야 했던 백목련의 헌심(獻心)을 알려 고나 하였을까?
목련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품종은 아니라고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백목련은 사실은 중국이 원산지란다. 한국의 토양에 식재되어온 귀화종이기 때문에 키는 그다지 크지 않고 낙엽을 지우지만 단아한 교목과(喬木科)에 속한다. 잎은 달걀모양으로 갸름하고 꽃은 유백색으로 우아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자목련은 제주도 한라산에서 자생한 품종이라고 한다. 또한 일본이 원산지인 자목련도 따로 있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목련(Magnolia)은 흰 꽃을 피우긴 해도 고온 건조한 기후에 적응되어 온 별종 목련이다. 한국의 백목련과는 전혀 다르다.
백목련은 시종 내게 어떤 인연일까? 오십 견통을 앓으며 잠시 일손을 놓고 있은 때가 있었다. 설핏 가을 햇볕에 탄 내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초롱초롱했던 눈까풀도 축 처져있었다. 그 때 저만치 앞서 가는 첫 사랑의 뒷모습이 보였다. 원고지를 구할 수 없어 흔한 용지에다 수필 몇 편을 육필로 썼다. 그것은 내 심중에 잠재해 있은 백목련이 문학으로 환생한 것이리라. 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하지 않던가. 마음 문을 열고 눈과 눈이 그윽하게 마주보고 있노라면 해묵은 가지에 돋는 싹 망울도 꽃으로 활짝 피어지지 않을까. 향긋하고 짜릿한 향내 감도는 그 꽃잎에 입 맞추며 살폿한 사랑에 빠져보고 싶었다. 상생하는 연리지(連理枝)처럼 여태 나눠보지 못한 정도 나눠보고 싶었다.
백목련은 내 구원의 여인상이며 잊고 있은 글과의 해후이자 살아 볼 만한 가치의 근원이다. ‘마뇽레스꼬’는 자기 고국 프랑스에선 짐을 싸 갖고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던가. 다시 신천지에서 썼던 그녀의 사랑 서사시에 탐닉한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 화원과 정원수 농장을 뒤져봤다. 그러나 일본산의 자목련은 많이 있었지만 내가 찾는 백목련은 있지 않았다. 묘목이나 씨앗 같은 것의 반입을 엄격하게 막고 있는 나라인지라 어찌해 볼 수가 없었다.
백목련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아버릴 순 없었다. 그랬다간 빈 쭉정이로 끝나버릴 내 인생이 너무 허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백년의 수명이 주어진다고 해도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삶은 최대치로 널려 잡아봐야 칠팔십년 안쪽이지 않겠는가. 풍토와 언어와 습관과 체질도 달라 이래저래 고단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다. 그런 것에 한정되지 않을 수 없기에 정을 쏟을만한 무엇에 정을 들이지 않고 어찌 무결한 삶을 살고 말건가? 그저 살아지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삶이 제대로 사는 삶일 게다!
다섯 번째로 이사한 집엔 캘리포니아 목련(Magnolia)이 세 그루나 있었다. 고온 건조한 땅에 뿌리를 내렸기에 상록수종으로 변종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집 앞길의 가로수가 모두 같은 수종들이었다. 문득 내 수필문학도 그것들과 아우르면 제대로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란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제 없이 웃자란 키에 둥치는 몸 관리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한 아름이 넘었다. 잎사귀는 투박한 머슴의 손바닥만큼 억셌다. 그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수줍음이라니. 둥굴막한 흰 꽃을 성글게 매달았으면 그대로 활짝 피워 보일 일이지. 잎사귀 사이에 숨어 피었다가 솔방울보다 딱딱한 열매를 어질어놓으면서도 미안한 기색은커녕 사철 낙엽을 마구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또 뭐람.
궁성거리다 말고 한 순간 갈퀴를 들었던 손에 맥이 풀렸다. 아, 더러는 깊은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그렇게 써내고 있는 오늘날의 글들이 그러하고 특히 내가 쓴 수필이 그 같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을 써도 오래된 간장 맛처럼 정이 우러나며 뒷맛도 은은한 수필을 써보고 싶었다. 갈 길은 멀고 보행은 서툰데 열정만 범람하는 글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 백목련처럼 속내 깊은 수필이면 좋을 듯싶었다. 하다못해 설익음을 면한 과실이거나 제 때를 알아차려 아집을 가라앉힌 때깔의 단풍잎 같은 수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백목련은 자목련과는 다른 면이 있다. 수종(樹種)이 다르므로 취향도 다를 수밖에. 자목련은 꽃을 피우면 꽃술을 드러내며 꽃잎을 한껏 펴 보이려한다. 그러나 백목련은 수필의 진수까지 익히려고 했던 걸까? 만개해도 꽃술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으며 꽃잎을 다 펴려하지 않는다. 백목련은 언제쯤 미완의 내 정념을 꽃 대궁 안으로 이끌고 꽃분을 입혀줄까.
제대로 된 수필 한 편을 얻기 위해선 백목련의 속내부터 알아차려야지. 어쩜 그것은 다시없는 연인이기에 더 깊은 열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묵시일 듯도 싶다.
박봉진
약 력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이사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문협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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