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을 벌여도 기가 죽으면 초반부터 당한다. 덩치가 아무리 커도 배짱이 좋으면 주먹 한번 휘두르지 않고 상대의 무릎을 꿀릴 수 있다. 권투선수들이 경기직전 링 한가운데 마주보고 서서 서로의 눈을 뽑아 먹을 듯 쏘아보는데 이 눈싸움에서 지면 기가 죽어 늘씬 얻어맞기 일쑤다. 아예 상대 눈초리를 피하는 권투선수들도 있다. 쓸데없이 눈싸움을 해서 자칫 지기라도 한다면 주눅이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기선을 제압 당하면 싸워보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병가의 진리다.
영화 ‘시 비스켓’(Seabiscuit)의 경주마 ‘시비스켓’은 눈싸움에 능하다. 시비스켓은 미국 대공항이 끝나갈 무렵인 1938년 실의에 빠진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준 경주마의 이름이다. 원래 경주마로서는 불합격 판정을 받아 사살 당하기 일보직전의 형편없는 말로 취급당했다.
이 천덕꾸러기 경주마가 역시 가난으로 학대받으며 자라난 레드 폴라드를 만나 호흡을 맞추며 승승장구한다. 그런데 그 비결이 주인공 말이 가진, 눈싸움에서 비롯된 특유의 오기와 곤조를 기수인 폴라드가 잘 간파한데 있다. 가난으로 한을 품고 살았던 기수와 역시 구박받고 살아온 한 말이 가진 오기의 합작품이라고나 할까.
기수인 폴라드는 경주마 시비스켓을 절대 서둘러 선두에 내몰지 않는다. 상대 경주마의 옆에서 나란히 달리며 시비스켓이 상대 말의 눈과 마주치도록 하는데 상대의 눈을 쏘아본 시비스켓은 오기가 발동해 전의를 불태우며 막판 혼신의 힘을 다바쳐 1위로 골인한다.
요즘 LA한인사회에는 타운을 관할하는 제10지구 LA시의원 보궐 선거가 핫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현 마틴 러드로우 시의원이 LA카운티 노조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공석이 된 10지구는 오는 11월 보궐 선거를 통해 2년 잔여 임기를 채울 시의원을 뽑게 된다.
한인타운의 거의 대부분과 남쪽 흑인, 그리고 서쪽 백인지역 일부가 포함된 이곳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네이트 홀든이 10여년간 시의원을 지낸 자리이기도 하다.
이달초 본보가 처음 러드로우 시의원의 사임설을 보도할 때 만 해도 한인사회에는 과거처럼 끌려 다니는 선거가 아니라 우리도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자신감이 팽배했었다.
더이상 돈만내고 정치인들 들러리만 서는 한인사회가 아니라 큰소리 치며 돈도 주고 우리몫도 챙기는 당당한 모습을 보일 때라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한인후보라도 내세우자는 의견도 모아졌었다. 비록 패한다해도 한인사회를 녹녹하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지난해 대선때는 불과 한달만에 1만명의 한인 유권자가 LA카운티에 등록했고 LA시장 예비선거서도 소수계 커뮤니티로서는 처음으로 한인타운에서 두차례나 후보 토론회를 가졌었다. 또 막판 결선에서 맞붙은 안토니오 비아라이고사 후보와 제임스 한 현 LA시장이 잇달아 본보를 방문해 한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할 정도로 한인사회의 정치력은 눈에 띄게 신장됐다.
그런데 최근 한인사회는 불과 몇주만에 전혀 다른 분위기로 반전되고 있다.
10지구 시의원 보궐선거에 허브 웨슨 전 가주하원의장이 출마를 선언하자 지도급 인사들이 먼저 나서 앞다퉈 줄대기에 매달리는 눈치다. 한인사회와의 친분도 깊고 타운 발전에도 기여한 웨슨 전의장을 밀어 주는 것이 타운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기가 죽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답답하다. 10지구 시의원 선거때마다 한인들은 많은 재정지원을 쏟아 부었지만 선거후 돌아온 이득은 별로 없었다. 선거도 하기 전에 두손을 들어버리면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상대의 힘이 강하다고 지레 겁먹고 안방을 내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또 내준다면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은 더욱 요원해 진다.
김정섭사회부장직무대리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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