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남편
지난 일요일, 아버지날을 맞이하여 우리 아들은 아빠에게 쿠폰 북과 30달러를 선물하였다. 그 선물을 위해 아들은 전날 나에게 25달러를 대출하였으며, 한동안 자기 방에 들어가 꿍시럭대면서 나름대로 자신이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다섯개의 서비스 쿠폰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함께 테니스 치는 쿠폰(2회 사용) 2. 함께 달리기 쿠폰(1회 사용) 3. 자신의 마술 트릭을 알려주는 쿠폰(2회 사용) 4. 마사지 쿠폰(3회 사용) 5. 뽀뽀 10회 쿠폰(5회 사용)
별것도 아니지만 남편은 매우 흡족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아버지날이라고 선물이나 카드를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으로 아들은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공평하게 지킨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아버지날을 점점 더 의식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 같다. 올해는 왠지 아버지날 선물 광고도 더 많이 보이는 것 같고, 미디어들도 아버지날 특집기사들을 더 많이 다루고 있으며, 주위에서 아버지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횟수도 늘어난 것 같다. 특히 한인사회에서는 요 몇 년새 ‘아버지학교’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해석이 내려지기도 한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는 ‘아버지들이 약해진 증거’라고 해석한다. 과거에 아버지들, 다시 말해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했을 때는 1년 365일이 아버지날이었기 때문에 따로 아버지를 의식하고 감사하는 일이 필요 없었다. 상대적으로 너무나 약자였던 어머니는 어머니날이면 식당마다 예약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든 사람이 알뜰히 챙겨온 반면, 아버지날이라고 있어봤자 솔직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아버지들이 ‘우리도 여기 있어요’ 하며 마구 손을 흔드는 느낌이다.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힘이 더 강한 가정들이 많아지면서 아버지들이 서서히 약자로 몰리는 추세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만 약해지는 것일까? 당연히 남편도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아버지와 남편에 대해 가져온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운 눈으로 부부관계를 이해해야할 때가 온 것 같다.
최근 월스트릿 저널 기사에 따르면 1965년부터 1995년사이 30년동안 여자들의 가사노동 시간은 일주일에 30시간에서 17.5시간으로 줄어든 반면 남자들이 집안 일 하는 시간은 4.9시간에서 10시간으로 두배나 뛰었다.(2000년 메릴랜드 대학 조사)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은 자기가 일을 훨씬 더 많이 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 기사가 인용한 또 다른 조사결과는 ‘여자들이 주장하는 것보다 남자들이 더 많이 가사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서울대학 이윤숙 교수와 시카고 대학의 린다 웨이트 교수가 자녀 있는 부부 265쌍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인데, 아내들은 남편이 가사일의 33%를 돕고 있다고 답하였고 남편들은 자기가 42%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조사팀이 실제 남편들의 가사일 참여도를 측정한 결과 39% 돕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서로 상대방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사를 읽어본 후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생각해보았더니 정말 우리 집에서도 남편이 집안 일을 상당히 많이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청소를 자주 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긴 해도, 빨래를 도와주고, 때론 마켓 장보기도 대신 해주며, 아들의 활동에 관해서는 거의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전담하는 일은 요리 하나뿐인데, 이것이 상당한 노동력과 전문성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무지하게 생색을 내고 있는 것이다.
남편 있는 여성들은 이번 기회에 가사일의 분담에 대해 한번 솔직한 마음으로 따져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각자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남편에게 좀더 감사한 마음도 갖게될 것이다.
남자들이 아버지로서나 남편으로서 점점 약해지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보다 가정의 건강에 매우 해롭다고 여겨진다. 부부관계란 누가 약하고 강해야하는 관계가 아니라,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서로 돕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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