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가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어긋나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8년간이나 버티어온 이 ‘6월’의 저주가 와르르 무너지는… 나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어머니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
수지는 오늘 아침도 열심히 전면 유리창을 닦고 있다. 이 웨딩샵 ‘쥰(June)’에서 거리를 향한 저 커다란 유리는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것인가. 이 앞을 지나던 처녀들이 그 유리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수많은 웨딩드레스에 눈을 빛내며 발걸음을 멈추곤 하니까.
몸이 가녀린 수지가 유리창을 닦고 있는 모습이 조금 안쓰럽긴 하다. 그래도 나는 엄연히 이 가게의 사장이고 그녀는 고용인인데........
수지가 내 가게에서 일을 한 것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별로 예쁘지도 그렇다고 세련되지도 않은 그녀가 웨당샵의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 왔을 때 나는 뭔가 애원하는 듯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꼭 일자리가 필요해요. 웨당샵은 처음이지만 다른 옷가게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어요.”
그녀는 웨당샵의 주인이 여자가 아닌 잘 생긴 남자라는 사실에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눌하게 말했다. 나이는 고작해야 스물여섯쯤으로 보였으나 알고 보니 서른 한 살이었다. 거기에다 그녀는 아이까지 하나 달린 미혼모였다.
“그럼 웨딩드레스를 입어 본 적이 있어요?” “아니요.......”
수지는 내 물음에 힘없이 대답했다. 나는 그 애달픈 눈을 들여다보며 그녀를 당장 고용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큰길가 웨딩드레스 가게 앞을 지날 때면 조그만 내 손을 꼭 잡은 채 늘 발걸음을 멈추었다.
“참 이쁘기도 하지. 나는 언제 저런 드레스 한번 입어보나.”
어머니는 쓸쓸히 미소를 짓다 그 자리를 떠나곤 했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시간 안에서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고, 젊고 아름답던 어머니는 그 드레스 가게 앞에 발걸음을 멈추며 차츰 늙어갔다.
언제부턴가 나는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꿈을 품어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어머니에게 선물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재봉사로 일을 시작했던 나는 서른 살이 넘었을 때 마침내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첫 번째 웨딩드레스를 만드는 동안 어머니는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품으로 남긴 어머니의 비밀상자 속엔 평생 이렇게 저렇게 모은 돈과 잘 생긴 남자 사진 한 장이 나왔다. 나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그 사진 속의 남자는 아주 오래 전에 어머니를 버렸다는 내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의 사진을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어머니가 남긴 돈으로 이 웨딩샵을 열었다. 어머니는 6월에 태어나 6월에 떠났고 나는 어머니의 열아홉 번째 생일 날, 그러니까 6월의 밤에 잉태되었다. 그 6월에서 적어도 내가 태어나고 어머니가 스무 번째 생일을 맞던 그 이듬해 6월까지는 아버지가 곁에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아버지는 끝내 어머니와 나를 버리고 떠나버렸다.
나는 개업을 하며 단번에 이 가게의 이름을 ‘쥰(June),이라 했다. 내가 잉태된 6월, 아버지가 날 버린 6월, 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6월이었으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어머니가 태어난 6월의 의미였다.
나는 지난 8년간 이 ‘쥰’에 많은 여자들을 고용했다. 내가 내세운 조건은 절대로 어머니처럼 예쁜 여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 또 어머니처럼 웨딩드레스를 입어보지 않은 여자라야 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예쁜 여자를 질투하게 마련이다.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기를 쓰는 예비신부들이 웨당샵의 아름다운 종업원에 의해 드레스를 고르고 입어본다면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다 그만 드레스를 포기하고 다른 가게로 가버릴지 모를 일이다.
또 이미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해 버린 여자를 고용한다면 그 꿈이 시들해진 종업원은 건조하고 상투적인 눈길로 예비신부들을 대할 것이 뻔했다. 나는 웨딩드레스의 꿈을 가진 여자를 원했다. 그 선망과 꿈이 타고 있는 눈길이어야만 드레스를 사러 온 예비신부들을 꿈으로 안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예상은 적중했고 지난 8년간 가게는 잘 운영되어 왔다. 처녀들은 잘생긴 총각사장인 나를 보며 알지 못한 교태를 부리다가 그저 그렇게 생긴 여종업원의 안내에 실컷 거드름을 피우며 드레스를 골랐다. 그리곤 거울 앞에 선 예비신부의 하얀 드레스 자락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짓는 여종업원의 눈빛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다 그 비싼 드레스에 돈을 지불했다.
이 가게를 거쳐 간 여러 여종업원들 중에 더러는 나와 관계를 맺어온 여자들도 있었다. 여자들은 나와의 관계가 시작되면 웨딩드레스를 바라볼 때마다 더 눈을 빛냈다. 그것은 적잖게 가게 운영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다 그녀들이 결혼을 요구하게 되면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들을 버렸다. 여자들은 때론 울며, 욕을 하며 떠나갔지만 곧 다른 여자를 고용하면 가게는 잘 굴러갔다.
수지는 유리창 윗 부분에 팔이 닿지 않아 걸레를 들고 깡총 뛰어 올랐다. 힘겹게 높은 유리면을 스치는 걸레조각을 바라보며 나는 느긋하게 모닝커피를 즐겼다. 지난 주말 나와 단 한번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해서 갑자기 수지를 사장인 나와 맞먹는 위치로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은 건지. 뭔가 애처로워 보이는 저 여자를 고용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끝내 수지와는 잠을 자지 않았어야 했는지.
나는 이제부터 수지가 끌어올릴 매상이 얼마나 될지 가늠해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웨딩드레스를 바라볼 때면 타는 듯한 애원이 어리는 그녀의 눈이 나와 관계를 맺은 뒤에 얼마나 더 황홀해질지 기대되었다. 예비신부들은 겸손하고 나긋나긋한 수지의 태도에 만족해하다 그녀의 꿈꾸는 눈을 바라보며 드레스를 사갈 것이다.
밖에서 유리창을 닦던 수지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예쁘지도 밉지도 않은 그녀는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추스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슬퍼 보이면서도 교태가 물씬 풍기는 눈길이었다. 나는 문득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 주말의 밤이 떠올라 온몸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외면해 버렸다.
여자들은 모두가 똑 같았다. 적어도 나에게 여자는 모두가 같은 의미일 뿐이었다. 수지라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었다. 나는 앞으로도 이 여자와 관계를 지속할 것이지만 만약 결혼을 요구한다면 다른 여자들처럼 내 가게에서 내 쫓을 것이다. 그런데 왜 수지의 눈길에 가슴이 뻐근해오는 것인지. 어쩌면 나도 이제는 지쳤는지도 모른다. 지난 8년간 ‘쥰’을 이런 식으로 이끌어 온 내 삶에 대해 조금씩 싫증이 나는 걸까.
아침햇살이 가게 안으로 깊숙이 비쳐 들어올 즈음 첫 번째 손님이 들어왔다. 체격이 늘씬한 처녀는 몹시 세련된 타입이었다. 그녀는 가게 안에 진열된 여러 디자인의 드레스들을 구경하며 다른 처녀들처럼 나에게 야릇한 눈길을 건넸다. 그리곤 곧 수지를 따라 드레싱 룸으로 들어갔다. 수지가 처녀에게 최신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히는 동안 나는 망연히 거리를 내다보았다. 또다시 6월이 피고 있었다. 가로수는 푸르러지고 여자들의 옷차림은 노출이 시작되었다. 사내들은 햇빛에 드러난 여자들의 어깨나 깊이 파인 가슴을 흘긋거리며 지나갔고 거리는 묘한 기운으로 흔들렸다. 이 표현할 수 없는 6월의 유혹 속에 내가 잉태되었던 걸까. 나는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레싱 룸의 문이 열렸다. 브이 네크의 심플한 디자인인 그 실크 드레스는 처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처녀의 표정이 뾰루퉁해 보였다. 처녀의 뒤에서 수지가 걸어 나오는 기척이 났다. 무심코 바라본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수지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선물하기 위해 처음으로 만들었던 그 드레스였다. 나는 그것을 어머니의 수의대신 입히려했으나 썩지 않는 소재를 수의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변의 만류에 그만두었던 것이다. 수지는 그 드레스를 어디서 찾아낸 것일까. 가녀린 수지의 몸에 드레스는 품이 좀 커보였지만 아주 잘 어울렸다. 어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유난히 레이스를 많이 넣어 만들었던 드레스..... 가녀린 수지의 목 주변을 품위 있게 에워싼 하얀 레이스는 유럽의 왕비복장을 연상케 했다. 평소에 단 한 번도 예쁜 여자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던 수지의 자태는 너무 아름다웠다. 그녀는 필경 지난 3개월 동안 이 가게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나 보다. 어느 날인가는 기어코 입어보기 위해서........
내가 넋을 잃고 수지를 바라보는 동안 처녀는 골이 난 듯 몸을 휙 돌려 드레싱 룸으로 도로 들어갔다. 그리곤 금세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나와 재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게를 나가버렸다. 수지가 의기양양하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음을 머금었다. 그 순간 나는 뭔가가 어긋나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8년간이나 버티어온 이 ‘6월’의 저주가 와르르 무너지는......... 나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어머니의 향기를 맡으며 눈을 반쯤 감았다. 그리고 수지에게로 다가가며 이제는 상술을 바꾸어야한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박경숙
약 력
1994년 미주한국일보로 등단
현재 미주한국문협 이사
세계한민족작가연합 이사
저서-소설집 ‘안개의 칼날’,
장편소설 ‘구부러진 길’
홈페이지
http://myhome.mijumunhak.com/pks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