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5월 마지막 주는 떠나는 계절의 시작이다. 이번 주말 메모리얼 데이 연휴를 기해 본격적인 휴가철로 접어드는 것이다. 지금부터 9월 첫주 노동절 연휴까지 석달은 마치 미 전국이, 모든 사람이 길을 떠나듯 술렁거릴 것이다. 해가 갈수록 나의 주변에서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자녀들을 다 키워낸 부부의 오랫동안 미루어온 유럽여행, 관광버스에 실려가는 단체여행, 구역예배 식구들이 함께 뭉친 캠핑여행…모두가 떠날 준비에 분주하고 마음은 이미 제각기 떠나기를 시작한듯 기대에 부풀어 보인다.
비슷한 일과, 숨찬 생활이 반복되는 매일을 살다보면 1년에 한두번 휴가계획을 세울 때처럼 즐거운 일도 드물 것이다. 그 즐거움은 편안한 휴식에 대한 기대보다는 떠난다는 설레임에서 온다. 편안히 쉬자면 내 집만한 곳이 있을 리 없다. 피곤하고, 불편하고, 때로는 불안하고, 그래서 여행을 고행이라고 한다해도 우리의 휴가는 ‘떠남’에서 시작된다.
여행전문가들 - 요즘은 모든게 전문화된 시대이니까 - 은 여행과 관광을 구별하고 싶어한다.‘여행가와 관광객의 다른 점은? 자신의 생각, 사고방식을 집에 두고 떠나는 사람과 가지고 떠나는 사람이다. 관광객은 여행지에서 집과 다르다고 불평하며 여행가는 왜 여기도 다른 데와 같으냐고 불만이다. 관광은 종래의 시각으로 누구나 다 가는 유명한 장소를 골라 보는 것이고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행도 관광도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란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집이라는 공간, 현재라는 시간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목적지에 닿기위해서 보다는 집에서 떠나기 위해서다. 여행을 하면서 다음 목적지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나, 묵을 곳은 어디인가에만 정신을 빼앗기는 사람은 출발했을 때처럼 돌아왔을 때도 바보인 채로 있을 것이다. 필립 체스터필드경이 한 이야기다.
왜 떠나는가. “처음엔 우리자신과 헤어지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결국은 새로운 자신을 찾아내 여행에서 돌아온다” 여러 권의 여행기를 써낸 피코 아이어의 이런 결론은 비전문가인 우리도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우리가 떠나고 싶은 것은 지친 일상이다. 해야 할 일, 알아야 할 일이 태산처럼 홍수처럼 우리를 압도하는 생활 속에서 실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적다. 그 차이가 때론 절망스러울 만큼 크게 느껴져 우리의 심신은 계속 움츠러든다. 새로운 정보야 가끔 외면할 수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일상 역시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 끊임없이 돌아오는 각종 페이먼트, 늘어가는 업무만큼 올라가지 않는 봉급, 점점 어려워지는 아이들의 학교, 갈수록 판단기준이 흐릿해져 가는 윤리관과 도덕, 어느 샌가 마음과는 달리 허물어져가는 건강…
잠시라도 이 모든 것을 털어내고 홀가분하게 떠나고 싶다면 최선의 처방은 혼자서의 여행이다. 그저 몸만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 사물에 대한 모든 의무로부터 벗어나 있는 시간을 뜻한다. 시계와 일과표에 맞춰 기계처럼 돌아가다가 숨을 돌려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경험이기도 하다. 물에 젖어 무거워진 신발같은 생활을 잠깐 벗어놓고 날개를 얻은 듯 일상의 틀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별로 용감하지 못한 내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휴가는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아무도 아는 사람없는 유럽의 낯선 도시 한 복판에 혼자 섰을 때, 처음의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듯 편안한 느낌이 기쁨처럼 나를 휩싸 안았다. 침묵하는 구경꾼의 한없는 자유를 만끽했던 두주의 여행길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 저편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여행은 이처럼 한걸음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재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생활의 각 부분들이 어떻게 연결되어가고 있는가를 새삼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고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과 만나면서 우리의 청각과 시각을 흐려 놓은 소음과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는 청소이기도 하다.
누군가 또 여행은 사랑과 같다고 했다. 우리를 깨어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며 익숙한 것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불안과 위험이 따르지만 새로 태어나 더 젊어진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멋진 보상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새벽의 문 열고 여행길 나서는 자는 행복하여라’ - 여행자를 위한 서시의 한 구절이다. 나도 떠나고 싶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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