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고우영을 기리며
뿌연 담배연기가 실내를 에워싸고 있다. 이쪽 저쪽에서 웅성거리며 웃음소리가 요란하다.
고우영이 일간스포츠 연재에 낼 원고뭉치를 보이며 매우 즐거운 모습으로 웃고 있다.
“안형 한잔 쭉 들고 나 잔 주시오”
오늘 따라 사뭇 정겨운 웃음을 만면에 흘리며 술잔을 권한다.
계속 기분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늘 자신있어 보이는 상상의 달인인 그는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들어 놓고 매우 흐뭇해 하고 있다.
고우영은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함께 할 때 정분을 나누며 우정을 나누던 각별한 친구이다.
나보다 몇 해를 더 살아온지라 생각과 행동이 앞서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한국일보 바로 옆 골목 선술집으로 기억한다. 마감시간을 끝내고 먼저 와 기다리던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반가이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천성이 고운 그는 말하는 모습도 순박하다.
나와 고우영은 한국일보에 관계를 하면서 하루를 거르지 않고 저녁이면 만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었다.
당시 나는 한국일보 사주의 일을 돌보고 있을 때이고, 고우영 김재영 방길영 등 신문사 기자들과 같이 어우러져 무교동 술집 골목을 주름잡으며 꽤나 낭만을 즐기며 음미하던 시절이었다.
유독 고우영에게 마음이 더 끌리고 다정하였던 것은 어쩌면 나와 생각과 정서가 비슷하여 유난히 정이 듬뿍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선술집에서 시장기를 채우고 얼큰히 취하고 나면 청진동 학사주점에서부터 무교동 단골주점들을 거르지 않고 찾아가 기세를 부리곤 하였다.
그 주점들 벽에 야한 그림을 그려 놓고 껄껄대며 한바탕 웃음을 날리기도 했다. 고우영이 그린 춘화도 밑에 나는 유별나게 상기된 글을 써놓는 버릇이 생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고 민망스럽기까지 하지만 사실 글이라고 쓴 것이 한 40년 전 그 때이니까 내가 작가로서 입문하게 된 동기가 꽤 오래 되었구나 하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고우영이 일사천리로 만화의 대가가 되면서 인기가 절정에 오르고 나는 나대로 기업을 이루어 사회인의 위치를 다져 가고 있었다. 서로가 바쁘고 방향이 달라 오랫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 고우영이 대장암 말기와 간암이라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예정된 시간’수필집을 내놓고 얼마 후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비통함을 느끼며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 망연할 뿐이었다.
하늘이 준 생명이니 살아 있는 동안 곱게 아끼며 죽음을 맞겠다는 그 때의 한 마디가 지금와서 심금을 울려 놓고 있다. 내가 아는 그는 고운 심성과 따뜻함을 잃지 않고 예술에 대한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는 초봄이었을 것이다. 광화문 학사주점에서 시작하여무교동 낭만과 향아촌까지 거스르며 우리는 진탕 취하였다. 나보다 더 취해 비틀대던 그를 부축하여 한강을 건너 집까지 데려다 준 적이 있다. 일어서 가려는 나를 한사코 붙들어 안방에 데리고 가더니 한번도 펴지 않은 요와 이불을 깔아 주며 막무가내로 자고 가라 한다. 혹시나 걱정스러워서 술을 깨고 가야된다는 깊은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눈을 떠보니 옆에 같이 누운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술을 마셨느냐는 듯 차분한 모습으로 서재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일 마감시간에 맞추어 연재할 원고를 가다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말은 않지만 무엇인가 느낌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 세월이 흐르고 종로 근처에서 마지막 만남이었나 생각이 든다.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둥근 베레모를 쓴 고우영이 지긋이 웃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웬만하면 다 알 수 있는 인기인들의 나들이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그들과의 동행을 저버리고 나와 긴 밤을 같이하던 그 시간들이 생각이 난다. 예술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삶에 자신을 투신하면서 그 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린다. 인간존재의 무상성을 표현한 사르트르를 이야기하며 긴 시간을 같이 보냈다. 하얗게 새벽이 오고 우리는 청진동 해장국집에 들러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근사한 예술을 위하여 건배를 들었다. 그 때 한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누구든 간에 나와 상상력을 견줄 자는 나오라고 했던가, 얼마나 당돌하고 자신에 찬 의지의 표출이었는지, 나는 다만 감격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 자그만 체구와 곱다란 얼굴에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에 찬 기염이 토해 나올까, 그는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임에 부족함이 없다. 탁월한 상상력과 창의력은 그가 다시 만든 삼국지의 유비 현덕 보다 더 지혜롭고 슬기롭다. 고우영과의 우정은 추억 속 한 순간으로 장식되어 있지만 그와의 대화 속에서 티없이 맑은 순수의 언어들은 앞으로 나의 문학 세계에 비옥한 퇴비가 될 것이다.
하늘이 준 생명이기에 죽음이 올 때까지 고이고이 간직하고 아름답게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고 고우영은 이제 먼길을 향해 떠났다. 수많은 팬들의 가슴속에 영원한 아름다움을 남겨 놓고 하늘의 부름 따라 떠났다. 가시는 길 부디 평온하시고 이승에서 못 다한 일 저승에서 이루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안주옥
시인·수필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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