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다 키워놓은 한국 친구들의 미국행이 꽤 잦아졌다. 전에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정신없이 들렀다가더니 이제는 진짜 여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재미없고 덜 자유롭다며 시간을 자꾸 본다. 한창 나이(?)에 퇴진해서 집안의 ‘붙박이’가 된 남편과의 동행길이고 남편이 늘 옆에 있기를 원한다는 것. “결혼부터 수십 년간은 얼굴 한번 제대로 보여줄 시간이 없더니…” 하고 허허거린다. 이젠 자기는 날마다 나갈 일도 있고 친구들도 많아 심심할 시간은커녕 과로사 할 지경인데 남편은 도통 문밖 출입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의 남편은 여러모로 뛰어난 실력자이고 출세도 빨랐다. 50세도 안된 나이에 대기업의 사장까지 올라갔다. 그러더니 어느 날 사표를 던지고 대사회 배신감만 잔뜩 안고 아내의 품속으로 뛰어 들어왔다. 승승장구할 줄만 알았지 속절없이 놀 때가 그리 쉽게 올 줄 몰랐던지라 상심이 컸다. 돈도 있고 자식들도 자신의 길을 잘 가며 ‘집 지킴이’로만 알았던 아내도 바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에는 도가 텄어도 노는 데는 문외한인 남편은 덩그런 집에서 의기소침의 나락서 헤매며 만만한 아내만 들들 볶는다.
겨우 50을 넘었는데 벌써 아내와 자식의 부담거리, 걱정거리가 된 그 잘 나가던 남편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여파는 한국 방문을 자주 하는 한인들에게도 미쳐 50~60대는 한국가도 만날 친구들이 없어 지루한 출장길이 됐다고 푸념이다. 또래들이 명퇴, 조퇴해서 산에만 다니고 두문불출하기 때문이란다. 왁자한 술과 노래잔치를 벌이며 3차, 4차까지 대접하던 인심은 사라졌고 어쩌다 만나도 풀죽은 얼굴로 밥 한 그릇 먹고 서둘러 돌아가는 뒷모습 때문에 울적하다고 했다.
한국과는 한참 다르기도 하고 비교적 오래 일하는 자영업 비율도 높지만 이곳 한인들도 결국은 일손을 놓게 될 때가 온다. 계획적 은퇴도 있지만 강제적으로 놀아야 할 때도 온다. ‘빌(bill) 때문에 빌빌대는 사회적응’이나 또 성취감이나 명예욕에서 정신없이 앞으로만 달려왔던 이들에게도 은퇴시기는 어김없이 닥친다. 같이 일하는 위치에 있었어도 남성은 여성보다 은퇴에 대한 공포가 심각하다. 남성들에게 은퇴는 곧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퇴물이 되는 신고식’이며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상실감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화려한 백수 꿈을 꾸면서도 정작 백수를 무서워하며 준비나 연습을 하지 않는다.
최근 주변에서 자주 눈에 띄는 은퇴 여성들의 새 삶은 은퇴도 아름답고 건강할 수 있구나란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IBM에서 30년을 일하고 조기 은퇴한 여성은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니 너무 행복하다”고 자랑이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테니스에 전념하고 한편으로 라인댄스에 열광하더니 라이선스까지 땄다. 또 한 명의 선배도 남편과 사별한 후 여행사 비즈니스를 미련 없이 때려치우고 은퇴를 선언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뒷모습이 처녀 같은 스포츠댄스 강사가 되어 용돈도 벌고 자원봉사도 한다며 신바람이다. 또 한 명은 은퇴 후 벌써 십여년을 LACC에서 지낸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책도 여러 권 저술했던 그녀지만 LACC의 무료나 다름없는 클래스를 “보석 밭이다”라며 이것저것 섭렵하면서 보람에 차 있다. 어린 학생 친구들과 어울려서인지 60대 중반에 접어들어도 소녀 같다.
교회나 비영리단체, 또 병원 등 자원봉사자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에서도 중노년기 여성들의 파워는 빛이 나고 있다. 하다못해 여행이나 문화행사 등에 몰려다니면서라도 은퇴후에 올 수 있는 정신적 육체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가고 있다.
어차피 오는 은퇴를 제대로 역량에 따라 잘 요리하는 이들에게서는 산불이나 홍수로 모든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진 흉물스런 산야에 얼마 안돼 파릇파릇 새 생명의 싹이 돋는 것을 보는 듯한 경이로움과 감동이 느껴진다. 리타이어라는 말뜻대로 타이어를 갈아 끼우고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찾아 만끽하기’는 이들은 또 다른 희망의 등대 불이 되어 주변을 밝힌다.
은퇴를 포용하고 ‘일하지 않고 노는 나’를 즐기기까지 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삶의 중간에서라도 미리 잘 노는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최근 나온 ‘한인 가정폭력이 이민 햇수도 오래되고 안정된 중년 이상에게 더 심각하다’는 통계가 걱정스럽지 않은가?
이정인 / 국제부 부장대우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