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 (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벗이여. 지난봄은 행복했습니다. 설악산 오색약수로 가는 길에 산수유 꽃빛에 취해 행복했습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정말 산수유는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연노랑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있었습니다.
그 계곡을 꿈꾸듯 헤치고 한계령으로 올라가던 길. 고개 마루엔 아직도 춘설(春雪)이 민들레 풀씨처럼 흩날렸습니다. 사뿐히 내리는 눈 조각을 맨 얼굴로 맞으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습니다. 천근같이 무거웠던 내 몸이 구름 위를 떠가듯 얼마나 가벼웠는지 모릅니다.
「민들레 풀씨처럼/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의 강을 건널 수는 없을까/ 민들레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슬프면 때로 슬피 울라고/ 그러면 민들레 풀씨처럼 가벼워진다고...」(유시화의 민들레 중에서)
벗 부부와의 지난 여행은 오랫동안 삶의 버거운 무게에 짓눌려 살아온 내게 치유(治癒)였습니다. 사실 30여 년을 이국 땅에서 안간힘을 쓰며 버텨온 나와 내 식솔들에게 어머니 품 같은 안식이었습니다. 어쩌면 고향에 돌아와 참았던 외로움을 풀고 마음껏 운 울음이었습니다. 그 서늘한 울음은 우리의 지친 심신을 민들레 풀씨처럼 가볍게 해 주었습니다.
친구여. 설악이 동해 낙산과 지척임은 큰 행운입니다. 산에 잠기는 고즈넉함과 바다에 안기는 안락함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초봄 설악 곳곳마다 막 피어오르는 새순의 정기를 듬뿍 받고 우리는 낙산사로 향했습니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설악이 바다를 연모해 옹골찬 기상을 접고 머문 절 입구 홍예문을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범종각을 지나 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까지 유유자적하며 나아갔지요. 경내의 개나리가 화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낙산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문무왕 때 세운 아름다운 절입니다. 낙산은 중생들을 고통에서 구하시는 관음보살이 항상 머물러 계신 곳이란 뜻이라 하지요. 인도에 있는 보타낙가산을 음역한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낙산사에 오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사찰의 위용에 눌리지 않고, 심산 적막에 침묵을 강요받지도 않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자애가 느껴지는 곳입니다.
친구여, 낙산사는 우리 모두의 추억이 서린 곳이지요. 제게도 학창의 추억이 아련합니다. 그 옛날 어렸던 동창들과 의상대 난간에 서서 일출을 보았습니다. 그런 후, 오랜 세월 지나 남의 땅 이민 생활이 힘들 때마다 가슴에 밀려오던 가장 그리운 소리... 그 때, 붉은 해를 맞으며 듣던 동해의 출렁이는 해조음(海潮音) 이었습니다.
그리고 홍련암! 의상대아래 바닷가 절벽에 세워진 작은 법당입니다. 의상대사가 7일 기도 후 붉은 연꽃이 핀 속에서 관음보살이 현현했다는 암자이지요. 그 절 마당에 서서 소설가 김훈의 글귀를 떠올렸습니다. 이 절 마당은 수직적인 고양감과 수평적인 무한감으로 가득하다. 멀리서 보면 새 둥지처럼 작은 절이고, 절 마당에서 보면 우주처럼 큰절이다. 법당마루의 작은 창을 열고 넓은 동해를 바라보며 우주같이 큰 자비가 하늘까지 충일(充溢)함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올 봄이 오자마자 낙산사가 활활 불타고 말았습니다. 양양군 야산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낙산사 송림을 송두리째 삼켰습니다. 그리고 경내로 들어가 홍예문과 해수관음전, 그리고 본전인 원통보전까지 사찰 건물 14채를 순식간에 태웠습니다. 화염에 휩싸인 범종각 사진은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동종(銅鐘)은 마치 화형대에 선 순교자처럼 불길 속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예종 임금이 아버지 세조를 위해 보시했다는 동종은 끝내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고 하지요.
벗이여. 세상엔 영원한 것이 없음을 다시 상기시켜 줍니다. 그래서 백년도 못되는 우리 인생은 민들레 풀씨 같이 유한한 존재겠지요. 그러나 지난 봄, 동해 여행은 우리가 가벼운 풀씨로 살아감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렇게 세상을 관조하며 날아가는 소박함. 훌훌 털어 버리고 메인 데 없이 흩어지는 자유함. 땅에 엎드려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을 품은 강인함. 그리고 추억만 먹고도 행복할 수 있는 무소유의 초연함.
천년 사찰 낙산사는 그 동안 전쟁과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됐다 재건되었다고 했습니다. 몽골 침입 때도, 육이오 동란 때도 전소되었다가 다시 복원되었습니다. 수년 후엔 불탄 낙산사가 다시 복구되겠지요. 훗날 산수유 꽃빛에 취해 설악을 돌다 다시 동해로 내려오는 날, 붉은 연꽃 한 송이로 다시 찬란하게 태어난 낙산사에서 친구를 다시 반갑게 만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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