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수필가, 환경엔지니어)
벗이여. 창밖에 훈훈한 봄비가 내립니다. 북 캘리포니아의 봄은 온통 연초록 새 생명의 축제입니다. 이 소생의 계절에 세계사(世界史)를 다시 섭렵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특히 19세기 사상의 변천사를 되새기며, 그 흐름을 현대의 삶에 비춰봅니다. 어제를 통해 오늘을 바라보려는 노력은 여전히 흥미로운 과제입니다.
잘 아시는 대로, 19세기 유럽은 계몽주의(啓蒙主義)를 꽃피웠습니다. 눈부신 과학의 발전 때문이지요. 물론 계몽주의의 본원은 17세기 데카르트입니다. 그는 냉철한 이성(理性)과 과학적 합리주의로 인간의 무지를 깨우쳐야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에 맞서 낭만주의(浪漫主義)가 나타났습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와 판단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은 아무리 배워도 순간적 충동에 따라 행동한다고 맞섰지요. 그 당시에 이런 진보적 사상의 출현은 놀랍습니다. 산업화가 가속화되고 기독교 윤리가 퇴색하면서 인간들은 감정표현에 더욱 솔직해졌기 때문이지요. 19세기말에는 비이성적인 낭만주의가 과학적 합리주의를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친구여. 여기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양대 사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할 필요를 느낍니다. 19세기 초, 과학적 합리주의를 꽃피운 사조가 실증주의(實證主義)입니다. 이는 추상적 이론보다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통한 자료만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합리주의의 우월성을 실험에서 증명된 사실만을 써서 나타내려 했지요.
이 즈음 챨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진화론(進化論)은 사회 모든 분야에 큰 충격을 던졌습니다. 다윈의 진화론, 적자생존의 논리는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이 비전통적 인간중심의 진화론은 낭만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요. 인간은 신에 의한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종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번져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사람들은 내가 왜 태어났는가? 하는 존재의 의미를 잃고 막연한 불안감에 싸이게 됩니다. 더구나 유럽인들은 진화론을 백인 우월주의를 합리화하는데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백인들이 유색 인종보다 우수함으로 정복할 권리가 있고, 실패한 민족은 망해도 당연하다는 이론을 펴나갔습니다.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이 팽창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진화이며 진보인가? 그 질문에는 그들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계몽주의의 대표적 비판자는 니체(1844-1900)입니다. 그는 신은 죽었다고 선포했지요. 인간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구원을 위해 초인(超人)의 등장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론은 스스로를 초인이라고 믿은 나치 히틀러의 등장을 도와주는 아이러니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유태계 의사였던 지그문트 프로이드(1856-1939)의 등장은 정신 과학의 대 전환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성적 판단보다 잠재의식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꿈의 세계에서 인간의 본능은 원래 선한 것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악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학설은 합리주의를 부정하고 본능에 좌우된 인간상을 부각시켰습니다. 이로써 현대의 인간은 자신도 믿지 못하는 존재임을 밝힌 셈이지요.
과학의 첨단인 물리학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17세기이래 뉴톤의 고전 물리학은 불변으로 알았지요. 뉴톤은 우주의 모든 만물은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는 인과(因果) 법칙에 의해 존재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고전 물리학이 전자(電子)의 세계에서는 적용되지 않음이 밝혀졌습니다. 미립자의 세계에서는 인과법칙 대신 가능성과 확률의 법칙만이 적용됨을 안 것입니다.
아인슈타인(1879-1955)은 상대성원리를 통해 불변으로 믿었던 시간마저도 변함을 증명해냈습니다. 사람들은 인간 두뇌에서 나온 모든 학문이 불확실함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 결과, 세상은 개인적 불안과 두려움에서 점차 민족간의 증오, 폭력의 난무 속으로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드디어 세계는 1차 대전, 대 살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친구여, 역사는 거울이란 말을 실감합니다.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비춰주는 거울. 인간이 최고의 사상과 이론을 세웠다고 자만하는 순간, 세상은 예전보다 더 아득한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과연 진리가 어디에 있을까요? 어쩌면 합리와 낭만,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그 사이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과학과 감성(感性), 어느 쪽에도 손닿지 않는 그 너머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아는 만큼 모른다는 것입니다. 창 밖의 비가 점점 세차게 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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