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콘클라베에 들어가기전 추기경들이 ‘완벽한 교황’을 맞춤 주문할 수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
카리스마 넘치지만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지성적이면서도 친화력 강하며, 이태리어, 스패니시, 영어정도는 구사하고, 너무 늙지도 너무 젊지도 않은 - 2,3년 병석에 누웠다 끝나는 것도 안되겠지만 또 다시 26년 재임하는 교황은 곤란하니까 - 교황청 행정에 능숙하면서도 존경받는 정신적 지도자. 지역 교구에 자율권 주되 적절한 제한은 가하며 가톨릭인구가 급증하는 제3세계 출신이지만 유럽과 긴밀한 유대로 침체된 유럽 교계에 활기를 줄 수 있는 ‘우리들의 교황님’.
요한바오로2세의 선종전후부터 몇주간 로마에 상주하며 온갖 관계자들을 인터뷰한 기자들이 만들어 본, 말하자면 ‘새 교황의 이상형’이다.
그러나 설사 이런 완벽에 가까운 이상형이 실재했다 해도 꼭 선출되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선출의 막후에는 정치가 주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새 교황 선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석은 회의 시작 전부터 분분했다. 추기경들도 교회의 가장 중요한 당면 이슈가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했다. 신임교황에 선출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서구의 주요관심사인 문화논쟁의 보수적 대변자였다. 제3세계 추기경들 중에도 라칭거 못지않은 보수파가 적지않다. 그러나 그들에겐 빈곤등 양떼들의 생존이 걸린 사회정의 실현이 훨씬 절박한 과제다. 또 진보적 서구의 추기경들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 해소가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선출은 가톨릭의 최우선 과제가 타락한 서구사회의 영혼 구원임을 말해준 셈이다.
추기경 라칭거는 색깔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피임, 낙태, 이혼, 안락사에 대한 절대 반대로 ‘생명의 문화’를 주창해온 요한 바오로2세의 ‘부교황’으로 불린 이념적 분신이었다. 가톨릭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불완전하다’고 몰아세운 것도 그였고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이며 유럽의 최고 지성’으로 칭송받는 것도 그였다.
극적인 카리스마는 없지만 명석하고 신념 강한 학자이며 유능한 행정가다. 부드러운 음성의 내성적인 사색가이며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즐겨치는 수준급의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도 젊었을 때는 교회 개혁을 요구하는 진보적 신학자였다. 학생운동이 유럽을 휩쓴 1968년 튀빙겐 대학교수시절 자신의 강의실을 점거하고 농성하는 학생들과 부딪치며 강경보수로 선회한 그는 1981년 요한바오로2세에 의해 바티칸의 요직인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내내 교리 수호의 강력한 집행관이었다. 특히 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요한바오로2세의 ‘시대착오적 교회정책’을 비판한 저명 교수 한스 큉을 비롯해 상당수의 진보적 신학자들에게 수업 및 출판금지의 처벌을 가한 것도 그였다.
그는 종교가 정치 및 도덕과 상충하는 교차점에서 벌어지는 모든 싸움에 나선 보수파의 선봉장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밝혀온 노선으로 미루어 보는 그의 어젠다는 명백하다. 교회 내에선 좀더 철저한 교리 수호를 강행하여 진보계를 제압할 것이고 교회 밖에선 세속화된 사회와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해방신학과 종교다원주의에 대해선 이미 반대를 확실히 했고 터키의 유럽연합가입 반대를 표명하면서 이슬람에 대해서도 선을 그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이 같은 대립이 아니다. 분열된 교회의 치유이고 교회에 등돌리는 사회와의 화해이며 11억 가톨릭인구의 통치자로 저버려서는 안될 세계평화에 대한 의무다.
한 진보학자는 요한바오로2세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천만 사람들이 별 죄의식 없이 그의 가르침에 반하는 생활을 하고있다고 지적한다. 피임하는 여성들, 동거하는 커플, 사형을 지지하는 보수파, 낙태권을 옹호하는 리버럴…이들이 교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일상에서의 실행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반대할 수 있지만 피임을 안할 수 없는 것이 일반인들의 솔직한 입장이다. 시행이 불가능한 법을 하나라도 고집한다면, 그래서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이를 지키지 못한다면 거기에서부터 모든 법이 다 무시될 수 있는 소지가 발생하는 것이다.
추기경 라칭거에게 수업금지를 당했던 한스 큉교수는 젊은 진보학자 라칭거에게 튀빙겐대학 교수직을 주선했던 이념의 동지였다. 이번 선출에 실망을 표시하면서도 그는 “교황직은 너무나 엄청난 도전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라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에게 기회를 주자”고 여지를 남겨두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열린 마음을 기대하는 것이다.
새 교황도 어제 첫 미사에서 개혁의 실현과 화합의 대화를 약속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그동안 역사가 증명해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가는 길도 추기경 라칭거가 걸어온 길과 많이 다를 수 있을 것이다.
박 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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