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은 타이태닉 호가 북대서양의 빙산과 충돌해 가라앉은 지 93년이 되는 날이다. 공교롭게 수많은 사람들이 얼음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되던 순간 한반도에서는 가장 많은 한국인을 죽인 김일성이 태어났다. 1912년 4월 15일은 여러 사람들에게 불길한 날이었다.
어찌됐든 이 타이태닉 호의 이야기는 수년 전 영화로 만들어져 공전의 히트를 쳤다. 리얼한 침몰 장면, 뜨거운 러브스토리, 정열적인 주제가 등이 어우러진 이 영화는 픽션으로서는 성공이었다. 그러나 영화에 묘사된 부분이 반드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빙산과의 충돌 장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상류층 인사들은 한결 같이 위선자거나 허영에 들떠 있고 탐욕에 가득 찬 인물들이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반면 배 밑바닥에 탄 하류층 사람들은 자유 분방하며 솔직 담백한 캐릭터를 갖고 있다. 대중에 표를 팔고 싶은 감독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사실이었을까.
당시 타이태닉 호 1등석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주로 미국과 유럽의 최고 거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절대 다수는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타이태닉과 함께 바다 속에 수장되는 길을 택했다. 요즘 한국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상류층의 의무’(noblesse oblige)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미국 부자들은 자신이 땀흘려 번 돈을 대부분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데 쓰려 하는 경향이 있다. 강철 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의 복음’에서 부자는 부의 ‘수탁인’이며 이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관리할 의무가 있다고 적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스탠포드 대학, 록펠러 재단 등등 수많은 교육 기관과 병원, 자선 단체가 세워졌다.
흔히 ‘부자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선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이는 미국 역사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카네기와 록펠러, 스탠포드가 떼돈을 벌던 19세기는 상속세와 소득세가 거의 없었다. 1797년 처음 생겼던 상속세는 4년 만에 철폐됐고 1862년 남북 전쟁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설됐던 상속세는 최고 세율이 6%에 불과했으며 그나마 1870년 다시 철폐됐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비 충당용으로 부과됐던 상속세 또한 1902년 사라졌다. 일정 소득 이상 재산의 절반을 정부가 가져가는 현대적 의미의 상속세와 소득세가 생긴 것은 1930년대 루즈벨트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다.
연방 하원은 지난 주 상속세를 완전히 없애는 세법 개정안을 272대 165라는 압도적 표 차로 통과시켰다. 이 안 찬성자들은 이미 세금을 내며 모은 재산에 소유주가 죽었다는 이유로 또 세금을 물리는 것은 부당하며 현행법 때문에 스몰 비즈니스나 농장주들이 대를 이어 가업을 물려주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반대자들은 부의 대물림은 인간 평등 정신에 어긋나고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다고 맞선다.
그러나 이런 주장보다 흥미로운 것은 상속세를 보는 미국 부자와 국민들의 태도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을 포함하는 많은 갑부들은 그 폐지에 반대한다. 이들은 자신이 쌓은 수 백억 달러의 부 가운데 99.99%를 사회에 환원하고 자식들에게 거의 남겨주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공언해왔다. 반면 상속세 폐지로 덕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건만 미 국민의 65%는 이에 찬성한다. 남이 이룩한 부지만 정당하게 번 이상 그건 번 사람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만약 한국에서 어떤 돈키호테 같은 국회의원이 상속세 폐지안을 제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통과가 안 되는 것은 물론 다음 선거 낙선 또한 불문가지일 것이다. 아니 ‘수구 꼴통’보다 더한 ‘악질 반동’으로 몰려 몸 성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 지조차 의문이다.
하긴 국민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사회적 책임을 망각한 채 위장 전입과 불법 증여를 일삼으며 까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려는 것이 한국 상류층 대부분의 모습이니까 말이다. 국민들은 상속세를 없애자고 하고 부자들은 이에 반대하는 모습을 한국에서 보는 것은 살아생전에는 어려울 것 같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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