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예상대로 공항은 발이 묶인 여행객들로 혼잡했다. 어제 내린 폭설 때문에 LA행 비행기가 2시간 늦춰진다는 방송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졌고 닥터 박 역시 누적된 피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추수감사절이 갓 지났을 뿐인데도 뉴욕은 벌써부터 성탄절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거리마다 넘쳐나는 크리스마스캐롤 때문인지 닥터 박은 매일 밤잠까지 설쳐 가며 낯선 도시의 축제를 즐겼다. 때문에 세미나 참석이 주목적인 이번 여행이 우연찮게도 닥터 박에게는 혼자만의 오붓한 겨울휴가가 된 셈이다.
저 한국분이시죠?
휴대전화로 아내와 막 통화를 마쳤을 때 앞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가 그에게 대뜸 말을 건넸다. 옆에는 어머니인 듯한 노인이 심기가 영 편치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녀는 그가 아내와 통화하는 내용을 들었는지 자신의 어머니도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했다. LA에 도착할 때까지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던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곧 대합실을 떠났다.
딸이 떠나자마자 노인은 닥터 박의 옆자리로 재빨리 옮겨 앉아 묻지도 않은 얘기를 주절주절 풀어놓았다. 조금 전 그 딸은 막내딸이고 자신은 외아들과 함께 뉴욕에 사는데 지금은 LA 맏딸집에 가는 중이라며... 순간 닥터 박은 이제 막 자신의 호젓한 휴가가 끝났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나저나 그쪽은 뭐 하시는 분이시유?
집이 어디냐, 아이들은 몇이냐 등의 일상적인 질문 끝에 기어이 직업 얘기가 나왔다. 사실 그건 닥터 박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질문이었다.
그는 신경정신과의사다. 한국에서 의대를 나온 그는 미국전문의 자격증을 딴 후로는 줄곧 한인타운에서 일해왔다. 따라서 환자들은 물론이고 접촉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인이지만 그는 평생 명함 따위를 만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정신과의사인 걸 아는 순간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을 털어놓거나 손쉽게 신경안정제 처방을 받으려하기 때문이다.
의사라고 솔직히 밝혔는데도 그분은 굳이 무슨 의사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쩌나, 노인한테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마지못해 그가 정신과의사라는 사실을 털어놓자마자, 아니나다를까 그분은 금새 자신의 불면증 얘기를 꺼냈다.
예상대로 원인은 고부갈등이었다. 한집에서 몸이 부서져라 손자들 봐줬더니 아이들 크고 저희들 자리잡고 나자 며느리가 자신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거였다. 요새 와서는 며느리가 부엌살림까지 챙기고 나서 갈등이 더 심한데 보다못한 막내딸이 LA 큰딸 집에 좀 계시다 오라며 비행기표를 끊어줬단다.
장가가기 전에는 그렇게도 효자더니... 사람 하나 잘못 들어와 기어이 모자간에 정까지 끊어놓았지 뭐유.
손가방을 움켜쥔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고부갈등... 인류는 언제쯤이나 이 모진 숙명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닥터 박은 결국 잠시 잊고있었던 자신의 문제와 다시 맞닥뜨렸다.
차분한 아내에 비하면 어머니는 급하고 호들갑스러웠다. 친척들에 의하면 어머니는 인정이 많아 툭하면 손수 떡을 해 돌렸지만 아무도 그분한테 익은 떡을 얻어 먹어본 적이 없단다. 이번 일도 결국 실속 없이 수선스럽기만 한 어머니의 성격이 발단이었다.
투표는 했냐? 아직 안 했으면 빨리 서둘러라. 기호 3번이다, 3번!
오후 5시쯤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는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 밖으로 튀어나올 듯 했다.
어머니, 저 지금 환자들 보느라 바빠요. 기호 3번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어머니는 선거철마다 그런 식으로 식구들을 닦달해댔다. 지난번 대통령선거 때도 아들, 며느리는 물론 노인회 회원들마다 붙들고 부시 지지를 호소했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니까 반드시 부시가 대통령이 되야 했듯이 이번에도 노인 어려워하고 싹싹해 보이니까 당연히 기호 3번이 한인회장이 되어야 했다.
그래 투표는 했냐? 그날 저녁 평소보다 늦게 퇴근해오는 며느리를 보자마자 어머니는 다그치듯 물으셨다.
아니요. 아내의 대꾸에 가시가 돋쳤다.
젊은것들이 그게 뭐 그리 힘들 일이라고... 어머니는 큰소리로 혀까지 끌끌 차셨다.
어머니는 낮에 아내의 회사에도 전화를 넣었던 모양이다. 한창 브리핑을 준비중이던 아내는 숨넘어가는 어머니의 전화내용에 분노마저 느꼈다고 했다. 물론 그 자신도 신중하지 못한 어머니의 성격이 싫었다. 그러나 그냥 바빠서 못했다면 될 것을 그렇게 야박하게 딱 잘라 말하는 아내 또한 야속했다. 때문에 며칠동안 부부가 피차 냉랭하게 지내다 떠나온 여행이었다.
젊어서와는 달리 아내는 요즘 어머니에 대해 부쩍 인내심을 잃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쌀쌀한 며느리의 태도에 쉽게 마음을 다치시곤 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닥터 박은 자신이 정신과 전문의라는 사실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닥터 박이 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에도 옆자리 노인은 계속해서 불면증을 호소했다.할머니, 나중에 집에 돌아가시면 꼭 병원에 다니세요. 이런 병 고쳐주는 게 바로 정신과의사예요.
날보고 병원에 다니라고? 그래서 될 일 같으면 애당초 병도 안 났지. 이제야 말이지 우리아들도 댁처럼 정신과의사요. 그나저나 의과대학에서는 에미는 죽든 말든 허구헌날 제 마누라 역성만 들라고 가르칩디까?
어디 중이 제 머리 깎는 것 보셨나요? 닥터 박은 꼭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그냥 꿀꺽 삼켰다. 굳이 변명을 해봐야 자신만 더 초라해질 테니까. 귀가길만 더 무겁게 느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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