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나는 색다른 조깅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조깅이 아니라 산책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듯싶다. 조깅은 빠른 경보를 하거나 뛰는 게 보통인데 동네 길에서 꺾어져 좁게 나 있는 그 길에만 들어서면 산사의 정적 같은 고요함이 깨질세라 발소리까지 신경을 쓰면서 사푼사푼 걸음을 옮겨야 하니 말이다.
원래 조깅을 하는 것은 운동이 우선순위이므로 주위의 경치에 그리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데도 그 길에 들어서면 나는 마치 아이샤핑을 즐기듯 볼거리에 탐닉한다. 일회용 종이컵을 꽂아둔 식수대가 분위기를 잡아주고 그 옆에 내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자그마한 개울이 자주 내린 여름 소낙비로 제법 물살을 일으키고 있다. 운치 있는 나무다리 아래로 흐르고 있다. 거기를 건너면 오솔길로 이어지고 그 길 저편에는 파란 융단처럼 잔디가 깔린 그림 같은 골프장도 있다. 그런데 반대편 오솔길 옆에는 바람에 날려온 씨앗으로 돋아난 잔 소나무들이 제각기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도토리 쭉정이들이 즐비한 나무 사이론 다람쥐란 놈이 분주를 떤다.
거기는 사람의 발길이 뜸한 탓인지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하다. 우리 집은 지난해 봄에 이 지역으로 이사를 왔는데 야생 씨앗들이 집 잔디밭에 날아와 제 멋대로 싹을 틔웠다. 그 중엔 어린 소나무들이 많았다. 수시로 뽑아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에 떨어진 소나무 홀씨들은 마치 잔디밭이 자기 땅인양 아무 데서나 자리를 잡고 커갔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제 자신에게 알맞은 자리가 있을 텐데 미련한 사람들처럼 그것들도 제 분수를 잘 모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잔디밭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소나무들이나 제멋대로 피어난 들꽃들도 불청객인 것은 다르지 않는데 왜 나는 유독 들꽃들에겐 후한 마음으로 살갑게 대해 주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로부터 별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끈질긴 생명력으로 길가에 돋아난 노란 민들레꽃과 가녀린 줄기에 위태롭게 붙어 솔바람에도 하늘거리던 이름 모를 연보라 빛 들꽃이 내 지내온 삶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무질서 속에서의 조화, 들꽃들은 그런 경지를 진작부터 터득하고 있었을까? 마치 조용할 때 낮은 음성으로 임하는 계시처럼 들꽃들의 미세한 몸짓들을 눈여겨보고, 귀 기울려 호소를 듣고 있노라면 그럴 것만 같다. 사람도 자연의 일원이고 자연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워야 하듯, 우리의 몸도 마음도 자연을 거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들꽃들은 다 알고 침묵으로 그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잔디밭에서 잔디가 아닌 것은 다 잡초라고 홀대하면서 우리 집 잔디밭에 뿌리를 내리는 잡초들은 무슨 꽃을 피울 것인가에 대해선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수시로 뽑아버리곤 했던 내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언젠가는 바람이 또 다른 잡초 씨들을 몰고 들어왔을 때 나는 그놈의 바람까지도 얄미워하지 않았던가. 마음으로 보지 않고 곁눈질로만 보았던 그 잡초들이 이리도 곱고 깨끗한 꽃을 피우는 들꽃들인 줄 그 때의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참으로 오랜만에 자연의 조화에 친숙해지려고 하는 이 시간이 더 할 수 없는 축복으로 느껴진다.
바람 부는 방향대로 홀씨를 날려 남의 땅이지만 군말 않고 가라는 대로 들어와서 타고난 생명력으로 자리를 잡고 이내 꽃을 피워내는 오지랖 넓은 민들레의 극성을 이제는 조금 알만하다. 샨델리아 전등갓 같이 생긴 이름 모를 연보랏빛 들꽃도 한 떨기 우아한 국화처럼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더구나 이 들꽃들은 정원에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화려한 꽃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을 내게 주고 있지 않는가. 마치 고통과 외로움을 겪고 난 뒤에 오는 맑고 고요한 명상가의 표정을 닮으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화려하지도 못하고 풍성하지도 못해 누가 눈 여겨 봐줄 것도 원치 않는 순박함! 주어진 여건에 겸허하게 순응하며 미안한 듯 다소곳이 피어있는 그 들꽃들의 내심이 내 마음이기를 청해본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 집 뜰에 날아 들어와 자란 잡풀들이기에 언젠가는 잔디 깎는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 깎여질 것을 생각하니 지금은 그게 안쓰럽다. 어느 하루 날을 잡아 나는 뒤뜰 한 군데에 그들만의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겠다. 그리고 한 삽씩 흙을 떠날라 그 뿌리들을 정성 들여 덮어주어야지.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이름 없는 들풀들이지만 누군가에게서 관심 받는 들꽃으로 피어나 솔바람에도 하늘거릴 수 있는 들풀은 외롭지 않을 것 아닌가.
해가 더 기울기 전에 나는 한 잔의 따끈한 녹차를 들고 나와 그 곁에서 소슬한 가을을 마셔보고 싶다.
고정희
약 력
경북 예천 출생. 중·고등학교 교사 역임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애틀랜타 가톨릭 월간지 ‘포도나무’ 편집인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