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하네
당나라 때 한산 스님의 글이라고 들었다. 중학교 다닐 때 멋모르고(참뜻) 그냥 그럴싸해서 외우고 다녔던 시다. 그랬던 것인데 얼굴에 세월 따라 파여지는 골이 깊어지고 머리 위에 서리 가 내리기 시작하니 이제 철이 들었는지 이 시구 절의 참뜻을 알 것 같다.
평생을 지지고 볶고 할퀴어가며 그칠 줄 모르고 아등바등 달려왔건만 남은 건 허탈과 아쉬움뿐이다. 본래 사바세계의 중생들이란 영원히 살 것처럼 뺏고 빼앗기며 진흙 구덩이에 뒹굴어 만신창이가 됐어도 이 고비만 넘기면 좋은 세상 오리라는 착각 속에 머무르는 동물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곧 그 꼴인 셈이다.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는가. 뒤늦게 깨달아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청산은 한겨울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왜 이렇게 추우냐고 따질 줄도 모르고 한여름 불볕더위가 내려 쪼여도 냉면이 먹고싶다고 칭얼댈 줄도 모른다. 물은 낮은 데로만 흐른다. 높은 자릴 탐할 줄 모르고 밑바닥으로만 기었어도 누구 한사람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바람은 그저 부는 대로 스쳐갈 뿐 꽃잎 하나라도 다칠 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평생을 낮은 대로 내려가면 떨어져 죽는 줄 알고 높은 자리만 탐하는 만용으로 손가락질 받아가며 부질없는 삶을 살아왔다.
어떤 이는 나는 무슨 회장을 했데, 이사장을 했네, 큰 것처럼 기고만장하지만 더 잘날 것도 없고 더 못날 것도 없고 너도나도 꼴불견일 뿐이다. 어차피 인간사란 도토리 키 재기인 것인데 조금 우쭐하고자 젖 먹든 힘까지 다 용을 썼으니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에게 한산 스님의 시는 내 평생의 탐욕과 세진을 깨끗이 씻어주는 샘물과도 같다.
골이 깊어진 흔적들을 거울 속에 들여다보니 숱한 아픔과 갈등, 사랑과 미움들을 세월 속으로 흘려보내면서 보람과 가치를 엮어내지 못한 지난날이 아쉬워진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며 시작한 삶인데 소중한 삶을 알차게 맺지 못하고 허탈만 남겼을 뿐이다. 중세기 로마의 한 승정이 북아프리카에 성인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단다.
“당신이 성인이 된 비결이 무엇이요?”
“뭐 비결이란 게 있습니까. 내가 구두 한 켤레를 수선할 때마다 예수님의 구두인 것처럼 정성과 성의를 다한 것뿐입니다.” 이 짧은 한 세월, 잠깐 사는 것을 정성과 성의를 다해 한 올 한 올 곱게 짜내지 못한 아쉬움을 독백해 본다.
정말로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정말로 보람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남을 해치지 않고 남에게 이로움을 주면서 산 사람, 페스탈로치, 나이팅게일, 몬테소리, 도산 안창호… 이런 분들의 삶이 곧 보람과 가치를 엮어낸 알찬 삶을 산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무수한 사람을 죽여가며, 울려가며 더럽고 추하게 이름을 남긴 사람도 많다. 비록 이름은 남기지 못할지라도 깨끗하게는 살아야겠다. 학처럼 조용하게, 난처럼 늠름하게, 우담바라(연꽃)처럼 청초하게 말이다. 학은 조용히 절대로 시끄럽지 않게 주어진 운명을 살다가 마지막 한번 울고 임종한단다. 1000년을 살면서 웃고 울고 뺏고 뺏기지 않으며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짝이 죽어도 개가할 줄 모르고 수절을 한단다.
그런데 사람은? 속으로 죽일 놈 하면서 겉으로는 사탕발림을 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앓이를 하면서도 콩글레츄레이션 하는 게 인간이다. 난을 사랑하는 깊은 뜻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향기가 좋아서, 잎사귀가 멋있어서, 품위가 있어서. 그러나 진짜 난을 사랑하는 깊은 뜻은 그게 아니다. 보통 꽃들은 해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법석을 떨지만 난은 늘 푸르기만 하다가 임종이 가까워서야 꽃을 피워 향기를 발산하고 마지막 숨결을 거두는 늠름함에 난을 사랑한다.
우담바라 연꽃은 3,000년 동안이나 더러운 물 속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고 3,000년의 기나긴 세월의 사연을 꽃 한 송이를 피우고 마지막을 고하는 청초함이 있다.
진작에 철이 났더라면 학처럼 고고하게, 난처럼 늠름하게, 우담바라처럼 청초하게 살았을 것을…
김석연
약 력
한국문협 회원. 미주기독교문협 회원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목사·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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