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숙<수필가>
너 거기 좀 앉아봐라.
오늘은 딱 걸렸다. 며칠 동안은 바쁘다는 핑계로 용케도 피했지만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꼼짝없이 아버지께 붙들렸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그분의 자세는 마치 새벽요가라도 하는 사람 마냥 꼿꼿했다.
공부를 지금처럼 좀 열심히 했어봐라, 그 좋은 머리 가지고. 누가 저보고 돈벌어 오라는 사람이 있나.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보다 옆에서 훈수를 두는 엄마가 때로는 더 원망스럽다. 당신 또한 깐깐한 남편 성격에 힘겨워하면서도 자식에 관해서는 부부가 어쩌면 그렇게도 똑같은지.
길게 얘기할 것 없다. 이번 토요일에 지난 번 얘기한 김박사 한 번 만나봐. 그쪽 이모 되는 분이 직접 주선한 거니까 어쨌든지 결례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도대체 이진희의 인생은 언제까지 이 타령일까? 그날 밤 그녀는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껏 부모의 과도한 기대와 지배로부터 독립하는 것, 오로지 그 목표 하나로 살아왔는지 모른다.
‘우수한 두뇌의 소유자, 고급전문직에 종사 가능’ 그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모 학습지회사가 실시한 아이큐테스트 결과다. 당시 테스트에 응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만그만한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이후로 아버지는 딸의 교육에 남은 평생을 걸었다. 몇 해 후 그분이 한국에서의 탄탄한 생활기반을 접고 선뜻 미국행을 결행한 것도 오로지 딸의 교육 때문이었다.
대학과 전공까지 아버지에 의해 선택 당했던 그녀는 대학원진학을 포기함으로써 마침내 반항의 첫 포문을 열었다. 이후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부동산 중개 일은 적성에 꼭 맞았지만 한동안 망연자실하던 아버지가 차선책으로 딸의 화려한 혼사에 전력투구하는 바람에 일은 전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갔다.
이진희씨죠?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너무 커서 불안한 두상, 뿔테안경 속의 실팍한 눈, 외계인과 교신하기에 딱 적합한 크고 뾰족한 귀... 그 남자는 우주공학박사가 아니라고 하면 도리어 이상할 그런 외모를 지녔다. 게다가 지나치게 적은 말수까지 한마디로 그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였다.
차라리 잘 된 거지 뭐. 어차피 당분간 결혼계획도 없었는데. 한 시간 남짓 애꿎은 커피만 달싹거리던 그녀에게 그 남자가 돌연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를 했다.
저어, 저한테 다른 부담 갖지 마시고 기왕 알게 됐으니 아담한 집이나 한 채 구해주세요.
네?
선뜻 믿기지 않았지만 진지한 그의 표정으로 봐서 결코 장난은 아닌 듯 했다.
실은 얼마 전부터 결혼과 상관없이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투자의 의미도 있고요. 그런데 진희씨, 이 일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오히려 내가 당부하고 싶은 말이지. 그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돈보다도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는 사실에 한층 희열을 느꼈다. 거절할 때 하더라도 예의상 몇 번은 더 만나야 비난을 면할텐데 함께 집을 보자면 적어도 그 문제는 자연스레 해결되는 셈이니까. 계약이 성사된 후, 나름대로 노력해봤지만 제짝이 아닌 것 같다고 슬그머니 발뺌을 하면 아버지인들 그때 가서 뭘 어쩌시려구.
예상대로 그는 공부만 잘했지 세상물정에는 어두웠다. 무조건 진희씨 판단에 맡길게요. 차라리 까다로운 고객이 낫지... 모든 걸 그의 입장에서 골고루 챙기다보니 지난 한두 달 사이에 두 사람은 벌써 10채가 넘는 집을 함께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는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편안하고 따뜻한 면이 있었다.
그래, 얘기는 많이 나눴냐?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다정한 말인가. 처음 김박사에게 집을 보여주고 온 날, 아버지는 끝내 당신의 흐뭇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그분의 말투는 그간 부녀간에 맴돌던 냉랭한 기류를 일시에 녹이고도 남을 만큼 따뜻했다. 순간 실낱같은 죄책감이 스쳤지만 결코 짜릿한 승리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7번째 집을 보던 날, 김박사에게 번번이 식사 대접을 받는 게 미안해 그날은 굳이 그녀가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밥은 자기가 살 테니 영화나 한편 보여 달랜다. 어어, 이렇게 되면 진짜 데이트가 되는데... 당혹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거절하는 건 너무 야박한 노릇이었다.
사람은 밥을 같이 먹으면 쉽게 가까워진다고 했던가? 함께 한 식사의 횟수가 늘어갈수록, 쌀쌀한 날씨에 그가 벗어준 외투를 걸쳐 본 후로, 또 그가 직접 뛰어가 사다준 기침약을 먹은 후로는 그는 더 이상 단순한 고객일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아버지에게도 승리감 따위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20번째로 들어선 집은 첫 느낌부터 좋았다. 전망이 툭 트였을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아늑한 느낌을 주는 집이었다. 오퍼를 넣기로 결정하고 언덕을 내려오는데 김박사가 슬쩍 한 마디를 던졌다. 우리 그 집에서 함께 살아요.
집까지 구했으니 이제 식만 올리면 되겠구나. 얼결에 청혼을 받고 더 얼결에 승낙을 했던 그날,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아버지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그럼 처음부터 다 알고 계셨어요?
물론이지. 김박사는 첫눈에 네게 반했다더라. 그 사람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세상사는 요령도 제법 있더구나.
돌고 돌아 제자리라고 이번에도 결국 아버지의 승리였다. 그러나 단지 반항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는 분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결혼은 썩 괜찮은 윈윈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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