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력 ‘갑절 신장’시너지 효과 내자
‘동반당선’ 경쟁적 협력관계로 승화
소외된 소수계 목소리 귀 기울여야
소신대로 후진 양성에 디딤돌 되길
한인이 사상 처음으로 미 시의원 선거에서 동반 당선이 확실시된다. 정치력에 목말라하던 커뮤니티에 이런 경사가 또 없다. 교육, 환경, 경제 등에서 주목받는 도시 어바인의 시의회에서 활동할 최석호, 강석희씨에게 거는 기대는 그래서 사뭇 각별하다.
1987년 12월16일. 한국의 13대 대통령을 뽑는 날이다. 여권의 노태우 후보,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후보가 나섰다. 다 아시다시피 여기서 김영삼, 김대중 후보는 민주진영을 대변하는 후보였다. 두 후보는 각자 자신의 지지세력을 기반으로 대선에 출마했지만 민주화를 열망하는 다수의 국민들은 이들의 후보 단일화를 간곡히 바랐었다.
그러나 단일화는 성사되지 않았다. 득표결과는 노태우 828만2,000여표, 김영삼 633만7,000여표, 김대중 611만3,000여표였다.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두 민주진영 후보가 동반 출마하지 않았더라면 국민의 열망은 가뿐히 실현될 수 있었다. 동반 당선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동반 출마에 대해 유권자들이 갖는 부정적인 시각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두 후보의 정치적 야심이 국가를 대로가 아닌 갓길로 이끈 데 대한 분노는 오래 지속됐다.
‘동반 현상’을 달갑지 않게 보는 시각은 정치판의 ‘비행’에서도 기인한다. 한국의 근대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좋은 예가 나온다. 이승만-이기붕의 동반 당선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이승만은 3선 개헌과 정·부통령 직선제안을 ‘기발한’ 사사오입으로 밀어붙였다.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야당과 언론을 탄압 했다.
동반 직선제는 이승만의 영구집권 획책의도에 반대하는 민심을 헤아리고 다독이는 것처럼 치장한 눈가림에 불과했다. 1960년 3월15일 선거에서 자신은 대통령에, 이기붕은 부통령에 당선됐다. 탄압정국에서 치른 부정선거는 민주적 선거라 할 수 없었기에 학생과 시민들이 들고일어났고 결국 정권은 붕괴됐다.
최근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남녀 동반당선제’가 거론됐다. 현행 선거제도 아래서는 여성후보가 남성후보에 비해 한결 불리하므로 이를 해소하기 의해 중선거구제를 도입한 뒤 남성 여성 후보 1명씩을 뽑자는 제안이다.
평등을 기치로 내걸고 있지만 과연 진정 남녀 평등과 민심을 아우른 생각인지 꺄우뚱해지는 대목이다. 여성 표를 의식해서인지 아니면 ‘여성차별’에 대한 한풀이를 하자는 것인지 의아하다. ‘동반’이란 말은 이래저래 씁쓰레한 뒷맛을 남긴다.
어바인 시의원 선거에 한인이 동반 출마하면서 정치력 신장을 갈망해 온 한인들은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했었다. 주류사회에서 한인 1명이 당선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두 사람이 동반 출마하겠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두 후보가 모두 당선되면 좋겠지만 그러다가 모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부재자 투표의 개표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지만 현재 상태라면 한인 두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고 있다. 하지만 선거 캠페인 기간에 한인들이 후보 단일화를 촉구한 것은 특정 후보를 더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정치력이 약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커뮤니티로서는 점진적인 신장을 원했던 것이다.
두 당선자는 이 점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만에 하나 “주위에서 무어라 떠들든 개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내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실망을 안겨 줄뿐이다. 열심히 뛰어 동반 당선됐지만 후보 단일화를 외친 한인들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당선자들은 “내가 잘나서 당선됐다”는 오만함을 손톱만치도 가져서는 안 된다. 정치력 제고를 위해 후보 단일화에 가슴 졸여온 한인들을 생각해야 한다.
두 당선자는 한인 유권자를 대변하는 게 아니라 어바인 유권자 모두의 대변자임을 잊어선 안 된다. 시의회에 처녀 진출한 만큼 주민 모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인을 위한 시의원이 아니라 어바인 주민을 위한 시의원이다. 이러한 자세로 의정을 펼치면 한인의 ‘이미지 업’은 자연스레 따라 온다. 우리의 정치력이 자리를 잡아가는 바람직한 과정이다.
민심을 제대로 읽기 위해 자문위원단을 구성하거나 연례보고서 작성을 추진하겠다는 당선자들의 계획이 가능한 조속히 실현돼, 감이나 즉흥적 판단이 아니라 잘 짜여진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의정이 됐으면 한다. 또 노인회관, 시립도서관 건립 등 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해, 폼잡는 시의원이 아니라 봉사하는 시의원 상을 정립해 주길 바란다.
그래도 피는 감출 수 없다. 한인들의 민원에 눈감지 말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협조해야 한다. 의정활동을 하거나 다음 선거에 출마했을 때 발로 뛰는 열성 지지자는 그래도 한인 유권자들과 한인사회에서 나올 것이다. LA폭동을 계기로 한인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깨달았듯이 주류사회에서도 커뮤니티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시의회 내 도시개발, 기획, 재정 등 3개 위원회에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소수계의 목소리가 적절히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당선자의 소감은 고무적이다. 또 한인 인재들이 시 정부 요직과 시 커미셔너에 임명될 수 있도록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으면 한다.
두 당선자가 선거 기간 중 경쟁으로 인한 긴장관계를 말끔히 해소하는 의미에서 악수를 하는 장면은 ‘준비된 시의원’의 의연한 모습이었다. 초심이 재임기간 내내 유지된다면 두 사람의 역량이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을 의심치 않는다.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한 표 한 표를 모았던 열의로 의정을 돌보면 분명 어바인 주민에게 득이 되고, 코리안에 대한 인식이 확 달라질 것이다.
두 당선자는 누구보다 2세 양성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선거 결과는 두 사람에게는 정계진출이란 열매지만, 우리 2세들에게는 정계진출을 위한 디딤돌이다. 능력 있는 2세들이 이 디딤돌을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이끌고 받혀주어야 한다. 오랜 세월 교육자로서, 장학재단 관계자로서 ‘꿈나무 양성’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두 당선자들이라 더 믿음이 간다.
“내 힘으로 이뤘다”는 생각은 잠깐일수록 좋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의정활동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 뒤 하나하나 사업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두 당선자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볼 것이고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들은 제대로 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볼 것이다. 두 당선자가 큰 부담을 느낄 정도로 그 어깨에 걸려 있는 짐이 무겁다. 그 무게를 쉼 없는 봉사로 승화하길 바란다.
박 봉 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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