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과 빛’(The Darkness and The Light)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 마지막으로 발간한 시집의 제목이다. 그 시인의 이름은 안소니 헥트(Anthony Hecht)로서 워싱턴 근교에 살고 있었고 과거 반세기동안 미국의 가장 저명한 시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칭송받은 시인이었는데 지난 10월 20일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뉴욕에서 태어났고 1968년 퓰리처상(Pulitzer Prize)를 비롯해 수많은 문학상을 받았으며 1982에서 1984년까지 시인으로서 최고 영예중 하나인 국회도서관 시 자문(Consultant in Poetry)으로도 일했었다. 그 이후 조지타운대학교의 교수로 가르치다가 1993년에 은퇴하였지만 사망할 때까지 끊임없이 작품활동을 해온 정력적인 시인이었다.
안소니 헥트가 근세에 가장 저명한 시인중 한 명으로 칭송을 받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정통적인 영시의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희랍신화, 17세기 셰익스피어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인들, 19세기의 불란서 상징주의 시인들, 20세기의 티 에스 엘리옷, 월레스 스티븐스, 엘리자베스 비숍, 그리고 오덴(W. H. Auden)같은 저명한 시인들과 같은 시세계를 암시하고 있다. 그의 시형태도 분명한 시어로 잘 다져지고 있으며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그의 시를 ‘맵시있는 문학’(Stylishly Literature)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안소니 헥트의 시를 들여다보면 그의 시세계는 그의 마지막 시집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어두움과 빛’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어두움에 대한 그의 시적 음유는 그의 시 전체를 흐르는 그치지 않는 줄기를 이룬다. 어느 평론가의 평과 같이 헥트에게 있어서는 인생이란 어두움이고 그라나 잠시 터지는 계시를 통하여 간혹 축복을 받는 어두움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어두움을 ‘정치적인 어두움’과 ‘도덕적인 어두움’으로 표출하여 점진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영혼의 어두움’을 그의 마지막 시집에서 묘사하면서 인생의 어두움과 빛이 간직하고 있는 참된 의미를 형상화한다. 그의 시세계를 들여다보자.
1968년 퓰리처상을 받은 ‘고난의 시간들’(The Hard Times)시집에 나오는 ‘좀 더 빛을! 좀 더 빛을!’은 세계2차대전 당시 홀로코스트의 한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적인 어두움이 가져오는 생명의 처참상을 나타내고 있다.
세 사람이 강제로 구덩이를 파고 있다/ 두 사람의 유대인은 구덩이 안에 누우라고/ 셋째 사람인 폴랜드 사람은 그들을 산채로 묻으라고 명령한다// 언덕 너머 바이마르 사당에서도 아무런 빛이/ 하늘에서도 아무런 빛이 비추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거절했다// 파란 폴랜드인 눈 속에 아무런 빛, 아무런 빛이 없다// 그는 배에 총을 맞아 세시간 동안 피 흘리다가 죽어 갔다//
시인은 ‘빛이 없음’을 네 번이나 반복하면서 정치적 어두움의 잔학상을 나타내고 있다.
많은 시인들이 ‘베네치안 베스퍼스’(The Venetian Vespers, 1980)를 그의 수작이라 말한다. 26 쪽이나 되는 긴 독백시에서 그는 죽어 가는 한 청년의 말을 빌려 타락과 비극으로 휩싸인 베니스의 도덕적인 어두움을 묘사하고 있다.
창문 밖 백악 같은 하얀 햇빛가운데/ 냉철하고 무표정한 속됨의 눈빛을 간직한/ 방탕한 젊은이들이 눈에 뛴다/ 단지 몇 해가 지나지 않아 그들은/ 카파치오의 창녀들 얼굴에 비춰지는 무서운 권태 속으로 사라져 갈진저//
그는 마지막시집에 나오는 ‘늦은 오후: 사랑의 맹공격’에서 영적 어두움의 극치를 천명한다.
어떤 이태리 미술가의 그림도/ 이 저녁의 완전함을 따를 수 없다/ 흙 반죽된 오일이 그림 물감의 기적이었다//
안소니 헥트는 정치적인 어두움, 도덕적인 어두움, 그리고 영적인 어두움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어두움과 동시에 약한 것 같지만 빛이 있음을 그의 마지막 시 ‘어두움과 빛은 주님에게는 동일하다’에서 묵상한다. 이 제목은 성경 시편 139편 12절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하나님은 빛에서나 어두움에서나 감찰할 수 있으시기 때문에 자기의 잃어버린 어두운 영혼을 찾아 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질질 끌리는 비단같이 빛이/ 감람나무에 달려 있다/ 낮의 퇴색한 포도주가 / 찌꺼기로 말라 가듯이/..../ 간밤을 견디어 온 연약한 노인같이/..../누구를 위하여 떠오르는 빛은/ 자기의 일식을 남기는가/ 명멸하며 찬란하게//
어두움 가운데서 우리는 볼 수 없지만 누군가가 빛을 마련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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