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선 성공한 조지 W. 부시대통령
부친 대선캠프 합류했다 정치 입문
9.11후 후세인정권 붕괴시킨 ‘강성’
보수층 지지바탕 수성‘가문의 영광’
백악관 수성에 성공한 조지 W. 부시 미합중국 43대 대통령은 보수층과 부유중산층을 대변하는 강성 ‘카우보이’ 대통령으로 내외에 각인되어 있다.
강력한 지도자 상을 앞세워 재선고지를 등정한 부시 대통령은 4년전 백악관에 처음 입성한 이후 참모의 역할에 비중을 두고 국정을 운영하되 최종 결단은 스스로 내리는 `보스형’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정치의 중앙무대인 워싱턴 정가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지난 2000년 공화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 민주당 후보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을 깨고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동생 젭 부시가 주지사를 맡고 있는 플로리다주의 부정 투·개표 시비로 개운찮게 집권했다.
취임 첫 해인 2001년 미 사상 최악의 참사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는 `9.11테러’를 당한 부시 대통령은 곧바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탈레반 정권 축출을 위한 아프가니스탄전쟁, 사담 후세인 정권 붕괴를 위한 이라크전쟁을 치르는 등 무력을 통해 신 패권주의를 추구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이라크에서 부시 행정부가 침공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WMD)가 발견되지 않고 미군 사망자가 1,100명에 육박하는 등 각종 악재가 이어지면서 힘겨운 선거전을 치러야 했다.
1946년 7월6일 조지 H. 부시 전 대통령과 바버라 부시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명문 예일대를 졸업(66년)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영학석사를 받았다. 1975년 석유중개회사를 차려 운영했으나 사업 수완을 발휘하지 못한 그는 1987년 보좌관으로서 부친 대선 캠프에 합류,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으로서 팀을 운영하며 대중적 인기를 맛본 부시 대통령은 1994년에 이어 1998년 텍사스 주지사에 재선되면서 백악관 도전의 꿈을 키웠다.
대통령 취임 초기 주지사 경험에 바탕을 둔 교육 및 범죄퇴치 부문의 정책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전임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로부터 넘겨받은 4,000억달러의 흑자를 모두 날리고 4,200억달러의 재정적자를 초래, 눈총을 받았으며 허버트 후버 대통령 이후 재임중 단 한 개의 일자리도 늘리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부시 대통령은 젊은 시절 한 때 방황하면서 심한 음주벽을 지녔으나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 술을 끊은 것으로 전해졌다. 2000년 대선전 끈질기게 따라다닌 마약 복용설로 혼쭐이 난 그는 2004년 선거전에서는 병역특혜 시비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재선실패의 ‘악몽’을 딛고 부시가문에 대통령연임이라는 ‘가족신화’를 창조하는데 성공했다.
부시 대통령은 1977년 결혼한 로라 여사와의 사이에 제나와 바바라 등 두 쌍둥이 딸을 두고 있다.
딕 체니 부통령은
부시가와 오랜 인연‘백악관 실세’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오른손이자 백악관의 ‘실세’로 꼽히는 딕 체니 부통령(63)은 정계와 재계에서 눈부신 경력을 쌓아 올린 노장이다.
지난 91년 이라크와의 걸프전 당시 국방장관으로서 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찬사를 받고 있는 그는 부시 대통령의 첫 정상도전 당시 부통령후보를 고르는 임무를 맡았다가 자신이 낙점된 이례적인 사례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특히 부시 당선자의 부친인 조지 부시 전 대통령행정부하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바 있어 부시 일가와는 2대에 걸쳐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됐다.
네브래스카주 링컨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예일대에 2년을 다니다 중퇴하고 와이오밍 대학에 다시 들어가 1965년 정치학 학위를 받고 졸업한 뒤 행정부 관리, 하원의원, 기업인 등 다양한 인생행로를 걸었으며 그때마다 성공적인 평가가 뒤따랐다.
그는 60년대말과 70년대초에 닉슨 행정부에서 하급 및 중급 관리로 일했으며 포드 전 대통령 집권기간인 75년에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대통령비서실장에 임명돼 비상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78년부터는 와이오밍주 하원의원으로 10여년간 활동하다 부시 전 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의회를 떠났다.
국방장관 재직시 제임스 베이커 당시 국무장관과 함께 미국의 대외정책을 주도하면서 특히 북한을 비롯한 제3세계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유럽과 아시아 주둔 미군의 전진배치를 강력히 주장했었다.
국방장관을 그만둔 뒤 지난 95년에는 거대 석유서비스사인 핼리버튼의 대표이사로 취임,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발휘했다. 그러나 그는 핼리버튼이 이라크 복구사업 시공업체 선정과정에서 특혜를 받았을 뿐 아니라 복구사업을 주도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폭리를 취하는 등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됨으로써 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부인 린 여사는 작가로 잡지 ‘워싱토니언’의 편집장을 지냈고 대학강단에도 선바 있는 다양한 경력의 여성계 명사로 슬하에 엘리자베스와 공개적 동성애자인 메리 등 두딸을 두고 있다.
<우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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